5월은 가정의 달이고 어제는 어버이날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번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한자로 “효(孝)”는 늙을 “노(老)”자에서 숟가락 비(匕)자를 빼고 아들 자(子)자를 넣은 모양입니다. 즉 효는 부모가 연로하여 숟가락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없을 때 자식이 그 숟가락을 대신 들어 드린다는 뜻입니다.
십계명 중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인데 이 계명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만 해야 합니다. 열 가지 계명 중에 아홉 가지 계명은 평생 나를 따라다닐 수 있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 만큼은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생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버이날의 유래를 잠시 살펴보면, 지금부터 약 100 여 년 전 미국 버지니아주 웹스터라는 마을에 ‘안나 자이비스’라는 소녀가 어머니와 단란하게 살았는데, 불행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안나 자이비스는 살았을 때 어머니를 잘 모시자는 운동을 벌여 1904년에 어머니날 행사가 처음 개최되었는데, 이 날 어머님이 살아계신 분은 붉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드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분은 자기 가슴에 흰 카네이션을 달게 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에서는 1913년 이래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 날로 정하였고, 점차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에 5월 8일을 어머니 날로 정하였으며, “그럼 아버지는 뭐냐”는 여론에 따라 1973년부터는 “어버이 날”로 바꾸었습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구별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정애라 오성림, 황혜진 서정훈,
이미경 선우 정, 이혜련 김리후,
김윤석 전옥희 김수아 김여진, 이주현 선우 진,
사진 안진현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프로이트는 ‘사람은 아버지의 이미지에 따라 그의 신관이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일리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관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식도 달라집니다.
비근한 예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들 수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주 무서운 하나님으로 표현됩니다. 진노의 하나님.그가 이렇듯 하나님의 진노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랄 때에 그의 아버지로가 엄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이미지(father image)’란 그 사람의 인생관에 이렇듯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언젠가 좌담을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특히 신약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아바 아바지, 아빠이십니다.
주기도문에도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 개념은 참으로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실 때에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부모를 네 종류로 구분하였습니다.
육신의 부모, 영적인 부모, 지식을 공급해 주는 스승,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 이 넷을 부모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나를 낳아주신 육신의 부모입니다.
부모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처음 세상에 태어난 것도 전적인 부모님의 은혜였고, 부모님의 품안에서 부모님의 젖을 먹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감사하게 될 때에 영적인 은혜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릴 때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기록이 많지 못합니다.
한 두 세절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 두세 절 가운데 누가복음 2장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둘째, 영적인 부모가 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신부님을 “Father”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아버지라는 뜻이요, 개신교에서는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영적 아버지인 목사와의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저는 여러분 앞에 대단히 조심스러운 존재입니다.
목회자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허물이 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목회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받아들일 때 자신에게 복이 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의 허물이 보이면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아비인 모세의 허물을 덮은 셈과 야벳은 자손 만대에 복을 받았습니다.
셋째, 나에게 지식을 공급해 주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스승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승을 사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넷째, 왕을 아버지라고 루터는 말했습니다.
국가의 원수를 존경할 수 없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를 존경해야 나라가 잘 되고 그래야 내가 잘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정치 지도자를 존경하는 마음이 참으로 아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존경받는 지도자가 나타나길 기도합니다.
우리 인간의 원죄는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지은 죄가 핑계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다 그럴듯한 핑계를 댄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 다 관행이다. 공무원들, 일손이 모자라서, 그런데 거의 다 네이버.
우리도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대며 삽니까?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데도 이유가 있고, 꼭 해야 할 일을 못하는 데도
수많은 핑계가 있지 않습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이유와 핑계를 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인 마가복음 7:11에 보면 ‘고르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람어로 정확하게 읽으면 ‘코르반’이고 본디 하나님께 바친 성별된 헌물, 제물을 뜻하는 말인데 점점 어떤 뜻으로 바뀌어 갔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이 돈은, 이 물건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것이다 하고 선언하면 다른 사람이 사용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좋은 뜻으로 시작된 고르반이 점차 변질되고 악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자식들 중에 부모를 공양하기 싫을 때, 부모 때문에 자기 돈 쓰지 않으려고 이 고르반을 악용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 자녀들 많습니다. 부모가 재산 있을 때는 한 푼이라도 더 물려받으려고 부모에게 온갖 아양을 떨지만, 거꾸로 이번에는 내가 부모 위해 돈을 써야 할 상황이 되면 너무 싫은 겁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또 내 자식 위해서는 좋은 음식, 좋은 옷, 최신형 핸드폰 사주고 과외비다 뭐다 엄청난 돈을 써도 안 아깝지만, 부모 위해 쓰는 돈은 너무 아까운 겁니다. 이런 나쁜 사람들이 지금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생각해 낸 기막힌 핑계가 바로 ‘고르반’이었던 것입니다. 부모 위해 내 돈 쓰는 게 싫을 때 이것은 고르반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기로 맹세한 것이다.” 하고 선언하면 다른 어떤 용도로도 쓸 수 없으니 부모를 위해서도 안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 좋은 척.
문제는 오늘날에도 이런 고르반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핑계, 우리의 고르반입니다. 부모 공경뿐만 아닙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안 하는 데도 우리는 수많은 고르반, 수많은 핑계가 있지 않습니까?
교회 잘 못 나오는 분들에게 “왜 요즘 교회 잘 못 나오세요?” 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바빠서요.”가 등등...
어떤 분은 왜 교회 잘 안 나오시냐고 물으니까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요.” 하고 대답합니다. 참 고르반이 다양하지요?
정말 하나님께 복 받는 인생이 되길 원한다면 내가 생각해낸 그 기막힌 고르반을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제일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고르반을 극복하고 벗어나도록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철저한 회개와 결단 없이는 우리는 언제든지 또 다른 그럴듯한 고르반을 생각해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르반은 참으로 우리를 뻔뻔하게 만들고, 우리를 망하게 하는 무서운 핑계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핑계만 보이고 마음이 있으면 길이 보인다> 멋진 말 아닙니까?
이 말을 꼭 기억하시고 안 될 이유, 못하는 이유 찾을 시간에 반대로 될 이유, 해야만 하는 이유, 할 있는 방법을 찾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고르반’ 핑계 대신 간절히 소망하고 결단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반드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성경, 특히 누가복음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돌아온 탕자만큼 아버지의 마음을 잘 표현한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으로는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나는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입니까?
한마디로 허용하는 아버지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아버지일수도 있습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고약한 아들을 둔 것도 한심하거니와 그런 아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는 이런 아버지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네 상식으로는 분명히 어리숙한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아버지의 그런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에는 낭비성이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사랑은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바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 내어주리니”
나의 모든 것을 허비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마음과 재산과 명예를 허비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24을 보면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우리는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오는 그 아들을 기뻐하며 맞이하는 어찌 보면 바보스러운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재산 따위야 다 버려도 좋으니 부디 돌아와 다오. 이것이 그 아버지의 진실입니다. 남들이 비웃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끝없는 사랑으로 끈기있게 기다립니다. 출세해서 돌아올 아들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탕자를 기다린 것입니다. 탕자가 어떠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인지 번연히 알면서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273장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바로 영혼의 아버지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우리 영혼도 그분을 떠나 있는 만큼이나 그분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씨앗입니다.
지금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든든한 부모와 형제가 있는 자는 고난과 시련을 만나도 외롭지 않으며
어떤 일 앞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인생의 모든 고난을 혼자 당하며 슬퍼했으나 그분의 자녀가 된 이후로는 고아와 같이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시는 그분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1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써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이 거칠고 힘든 세상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