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5월 5일은 어린이날이었고, 오늘 8일은 어버이날입
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는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먼저 어린이 주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14을 보면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어린아이를 근대 철학의 완성자라고 하는 니체는 인간이 다시 어린 아이가 됨으로써 가장 바람직한 인간인 ‘초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고 얽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니체의 초인은 자기 세계가 분명하며 어린아이와 같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어린이 주일의 근본 유래는 미국과 한국이 다릅니다.
미국은 지금으로부터 166년 전인 1856년 레오날드 목사님이 어린이들을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훈련시키기 위하여 온통 꽃으로 장식된 강단에서
교회 나오는 어린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안고 안수기도를 해 주며 축복해 주신 것을 통하여 어린이주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반면에 한국에서의 어린이날은 3.1운동 후에 어린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방정환 선생님을 중심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는 유학생들로 이루어진 “색동회”가 주동이 되어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했습니다.
해방 후 1946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변경해서 현재에까지 이릅니다.
어린이날 선물
“(1절)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2절) 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어버이날의 유래를 잠시 살펴보면, 지금부터 약 100 여 년 전 미국 버지니아주 웹스터라는 마을에 ‘안나 자이비스’라는 소녀가 어머니와 단란하게 살았는데, 불행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안나 자이비스는 살았을 때 어머니를 잘 모시자는 운동을 벌여 1904년에 어머니날 행사가 처음 개최되었는데, 이 날 어머님이 살아계신 분은 붉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드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분은 자기 가슴에 흰 카네이션을 달게 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에서는 1913년 이래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 날로 정하였고, 점차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에 5월 8일을 어머니 날로 정하였으며, “그럼 아버지는 뭐냐”는 여론에 따라 1973년부터는 “어버이 날”로 바꾸었습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구별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카네이션
썰렁 개그, 나이드신 분들이 제일 좋아하는 동네.
청와대 옆에 있는 동네인 효자동이라고 합니다.
그 마을 이름이 왜 효자동이 되었는지 그 유래가 이렇다고 합니다.
효자동에 살던 어느 할아버지가 손주를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항상 옆에 꼭 데리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손주를 품에 꼭 껴안고 낮잠을 잤는데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몸을 돌리다가 그 귀여운 손주를 깔고 누워서 손주가 죽었습니다.
며느리가 아들에게 죽은 아이를 안고 뛰어가서 알렸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들은 아들이 사정없이 죽은 아이의 볼기짝을 찰싹 때렸습니다.
“이 나쁜 놈, 네가 이렇게 죽으면 우리 늙은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느냐. 이 불효한 놈아!” 그러면서 죽은 아이의 볼기짝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죽은 그 아이가 하품을 하면서 깨어나더랍니다.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이 효자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부모를 네 종류로 구분하였습니다.
육신의 부모, 영적인 부모, 지식을 공급해 주는 스승,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 이 넷을 부모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나를 낳아주신 육신의 부모입니다.
육신 부모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처음 세상에 태어난 것도 전적인 부모님의 은혜였고, 부모님의 품안에서 부모님의 젖을 먹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감사하게 될 때에 영적인 은혜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부모가 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신부님을 “Father”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아버지라는 뜻이요, 개신교에서는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영적 아버지인 목사와의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저는 여러분 앞에 대단히 조심스러운 존재입니다.
저의 허물이 보이면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아비인 모세의 허물을 주변에 떠들어댄 함은 저주를 받은 반면 아비의 허물을 덮은 셈과 야벳은 자손 만대에 복을 받았습니다.
셋째, 나에게 지식을 공급해 주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스승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승을 사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넷째, 왕을 아버지라고 루터는 말했습니다.
국가의 원수를 존경할 수 없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입니다.
지금의 당선인이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나타나는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입니까?
한마디로 허용하는 아버지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아버지일수도 있습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고약한 아들을 둔 것도 한심하거니와 그런 아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는 이런 아버지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 아버지의 그런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낭비성이 있습니다. 사랑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바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주리니”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탕자가 어떠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인지 번연히 알면서 기다린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는 이 한 가지 기쁨에 더불어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 안에서 아버지의 이 벅찬 기쁨을 함께 수용하고 누리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모든 부끄러움과 죄송스런 마음과 죄책감을 다 묻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 기쁨에 참여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이렇게 염치없이 뻔뻔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인간의 원죄는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지은 죄가 핑계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다 그럴듯한 핑계를 댄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 다 관행이다. 공무원들, 일손이 모자라서, 그런데 거의 다 네이버.
우리도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대며 삽니까?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데도 이유가 있고, 꼭 해야 할 일을 못하는 데도
수많은 핑계가 있지 않습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이유와 핑계를 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인 마가복음 7:11에 보면 ‘고르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람어로 정확하게 읽으면 ‘코르반’이고 본디 하나님께 바친 성별된 헌물, 제물을 뜻하는 말인데 점점 어떤 뜻으로 바뀌어 갔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이 돈은, 이 물건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것이다 하고 선언하면 다른 사람이 사용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좋은 뜻으로 시작된 고르반이 점차 변질되고 악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자식들 중에 부모를 공양하기 싫을 때, 부모 때문에 자기 돈 쓰지 않으려고 이 고르반을 악용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또한 물질적으로도 부모를 섬긴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제일 먼저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자신의 모든 수입, 수확한 곡식이나 과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제일 먼저 바칩니다. 그 다음에는 부모에게 일부를 드려서 부모가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 시대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니 로마에게 세금 내고 뭐 떼고 뭐 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은 이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에이 너무 아깝다. 이거 갖고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이야? 하나님한테 드리는 십일조도 사실 별로 드리고 싶지 않은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 생길까봐 안 할 수도 없고, 로마에게 세금 안 냈다가는 당장 요절 날 테니 안 낼 수도 없고...”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제일 만만한 게 바로 부모 공양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궁리를 한 결과 생각해낸 묘안이 바로 ‘고르반’ 제도입니다.
특히 예수님 시대에 이 ‘고르반’ 제도는 정말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르반은 “말로만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7장 11절 말씀을 다시 읽을까요?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말로만 하면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께 고르반 예물로 바치는 것도 아니고 말로만 “이건 고르반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겁니다.” 하고 말로만 하고 끝났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이 ‘고르반’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고르반을 지킨다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을 사람이 만든 제도와 계명을 따른답시고 하나님이 정한 계명을 저버리는 자들이라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먼저지, 어떻게 사람이 정해놓은 제도나 계명이 먼저냐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십계명 중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그 효도는 살아 계실 때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 죽은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조상을 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조상은 위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제사가 죽은 조상에게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살아 생전에 불효하다가 부모 돌아가신 다음 성대하게 제사상 차려놓고
절한다고 무슨 유익이 있고 소용이 되겠습니까?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 후회하지 말고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기 바랍니다.
열 가지 계명 중에 아홉 가지 계명은 평생 나를 따라다닐 수 있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제5계명만큼은 어느 날 문득 내 곁을 떠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홉 가지 계명은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 만큼은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에도 이런 고르반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핑계, 우리의 고르반입니다. 부모 공경뿐만 아닙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안 하는 데도 우리는 수많은 고르반, 수많은 핑계가 있지 않습니까?
교회 잘 못 나오는 분들에게 “왜 요즘 교회 잘 못 나오세요?” 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바빠서요.”가 등등...
어떤 분은 왜 교회 잘 안 나오시냐고 물으니까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요.” 하고 대답합니다. 참 고르반이 다양하지요?
정말 하나님께 복 받는 인생이 되길 원한다면 내가 생각해낸 그 기막힌 고르반을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제일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고르반을 극복하고 벗어나도록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철저한 회개와 결단 없이는 우리는 언제든지 또 다른 그럴듯한 고르반을 생각해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르반은 참으로 우리를 뻔뻔하게 만들고, 우리를 망하게 하는 무서운 핑계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핑계만 보이고 마음이 있으면 길이 보인다> 멋진 말 아닙니까?
이 말을 꼭 기억하시고 안 될 이유, 못하는 이유 찾을 시간에 반대로 될 이유, 해야만 하는 이유, 할 있는 방법을 찾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고르반’ 핑계 대신 간절히 소망하고 결단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반드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효도 중의 효도는 부모님을 예수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신앙이듯이 부모에게도 최고의 선물은 신앙.
왜? 하늘 나라에서 영원토록 같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구원받도록 해야 합니다.
순교적인 각오를 가지고 부모님에게 예수를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효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모님을 섬긴 효자 성도에겐 특별한 상급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6:2,3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 공경만큼은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보너스가 두둑한 계명이란 얘기입니다.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계명이 바로 제5계명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첫째 계명이고,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이 가정의 달에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어린아이들을 하나님의 계명으로 올곧게 키우고,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께 효도함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락을 이 땅에서 누리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43-49장
43장 형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다. 34절
44장 형제들에 대한 요셉의 은잔 시험과 유다의 감동적인 탄원
45장 정체를 밝히는 요셉과 바로의 환대 및 야곱의 애굽 이주 결정
5절 7절 8절
46장 야곱 가문의 애굽 이주와 야곱과 요셉의 상봉
47장 야곱 가문의 애곱 정착과 요셉의 치세 및 야곱의 유언
48장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한 야곱의 축복
49장 열 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축복 및 마지막 당부와 임종
3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