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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 (창세기 2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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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귀가 그동안 영적 전쟁에서 수많은 성도들을 실족시키고 시험에 들게 한 여러 가지 무기들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무기 앞에는 ‘Not For Sale(팔지 않음)’이라는 푯말이 있었습니다. “왜 이 물건을 팔지 않소?” “예, 이 물건만큼은 절대로 팔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능이 효과만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 무기만 사용하기만 하면 금방 시험에 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러자 호기심이 발동한 고객이 마귀를 향하여 “그 무기의 이름은 무엇이오?” “이 무기의 이름은 바로 낙심(낙담)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일단 낙심이 임하고 그로 인하여서 절망하거나 좌절하게 되면 마음이 물같이 녹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조정해 버립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들락날락하면서 별 짓을 다하게 됩니다. 

결국에 가서는 그 사람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단 마귀의 본 직업이요 사명입니다. 속으시면 안됩니다. 

 

지난 주 남이섬 야외예배와 세례식.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세벨.

손가락, 이 수술, 

중명전(이화 여고 앞)과 윤동주 문학관.

 

우리 모두는 평탄한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사노라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사건들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뜻밖의 사건들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영화나 소설 같은 것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믿는 사람이란, 신앙인이란, 크리스찬이란, 그 뜻밖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발견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앞날을 늘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에 맞게 우리의 때에 맞게 적절히 우리 

인생의 앞길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자꾸 잊어버려서 그렇지.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는 ‘여호와 이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하나님이 함께 보신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신다. 하나님께서 눈을 떼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팔짱끼고 구경만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준비하시고 채워주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1, 2, 3절을 먼저 읽습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시험한다는 것이 어떤 뜻일까? 시험의 뜻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 째는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험은 테스트라는 의미가 사실은 더 적합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더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종종 시험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그냥 신앙이 자라지는 않습니다. 

제일 좋은 도구가 고난. 질문을 던지고 연구.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와서는 “네 아들 이삭을 내게 번제로 바치라” 아주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번제는 다리를 다 잘라내어 각을 뜨고 내장을 드러낸 후 태워서 드리는 것인데, 이런 방법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럴 리가 없는 하나님입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그런 주문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아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25년 만에 얻은 아들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아마 그날 밤을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고민했을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이 내게 이런 요구를 하실 수 있나. 

그런데 역시 아브라함 이예요.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이는 그 하나님의 명령 앞에 아브라함은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냥 쉽게 순종될 것 같습니까? 고통 없이 순종될 것 같습니까?

순종하려면 갈등하고 고뇌 하고 울기도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순종은 바꾸어 말하면 반응을 가리킵니다. 영적 성숙은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도 미루지 말고. 

미루면 기회가 없어. 

 

자 3절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일찍 일어났다는 의미는 그가 하나님 앞에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즉시 순종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리아 산으로 가는데 이 아브라함이 거주하는 브엘세바(언약의 우물)로 부터 모리아산까지는 약 3일 길이 걸립니다. 

이 모리아산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터입니다. 

이삭이 드려지던 바로 그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게 됩니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겁니다. 

 

5절을 읽어보십니다. 

5절을 보니까 종들에게 기다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방해자를 다 뒤로 남겨뒀습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만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이 예배라는 표현은 사실은 창세기에 이 22장에서 처음 나오는 거예요. 

그 앞에는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다. 뭐 단을 쌓았다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라는 표현이 소개되어집니다. 

아브라함이 그 때 예배드릴 상황이었을까? 

여러분 우린 힘들어도 기뻐도 즐거워도 질병이 와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일만은 중단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예배 받으시기 위해서. 

“예배에 성공해야 인생에 성공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인생,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지요.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신령과 진정, 예배가 무엇입니까?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을 드리고, 참석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찬송, 기도 등은 예배의 요소이지 예배 자체는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의 참 사랑을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는지를 보여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런저런 예배의 요소를 다 갖추었지만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이, 사랑함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사실은 죽은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여러분들 분명히 가서 제물로 바치고 오면 이삭은 없을 거예요. 

아브라함 혼자 돌아올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돌아온다.’ 복수를 사용하고 있어요. 

이것을 히브리서 11:19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이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은 가장 위대한 순종을 하였고, 이 순종은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참 기가 막히죠, 이삭을 바친 곳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순종.

 

하나님의 명령에 이삭을 결박하고 제물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로 내리 찌르려고 했던 그 모습에서 아브라함은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 합격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참 믿음으로 드린 아브라함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에게 주신 축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이레’의 축복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축복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놓으신, 준비해 놓으신 축복이 반드시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그 축복을 발견하여 내 것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축복은 비밀의 커튼에 가려져 있어서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열려 있는 것입니다. 나는 순종하기만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더라.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언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경험을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단을 쌓았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언제였습니까?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할 때였습니다. 바로 순종의 마지막 단계에 있었을 때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어떤 일이든지 하다가 중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봉사도 하다가 중단합니다. 섬기다가 중단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용두사미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훈련. 

요한계시록 2:26절에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 아브라함을 위해서 한 마리의 숫양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우리 13절, 14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여기 여호와 이레가 나오네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보면 때로는 손해 보는 일들도 있고 

큰 것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일들을 진행시키면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예비 하신 축복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았던 아브라함을 생각하시면서 

그의 필요를 채워주셨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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