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세상의 현실은 뒤로하고 내세만 강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육신적인 일은 뒤로하고 영혼에 관한 것만 중요시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기독교는 영, 혼, 육 전반에 걸쳐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승리와 행복을 가져오게 하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사단은 신앙 생활과 우리들의 삶을 괴리시킨다라고 합니다. 즉 신앙 생활은 영적인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 곳에는 반드시 새 생명이 태어나고
새 인생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가리켜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은혜로 사는 생활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은혜를 알기에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빌립보서를 쓴 사도 바울도 10절에서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기쁨의 원천은 환경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옥에 갇혔을 때나 나왔을 때나 언제든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기뻐하는 생활을 한 것은 바로 이 영적 부요를 맛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영적으로 부요하기만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생각이 달라야 하고,
관심이 달라야 하고, 가치관이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할 때는 신앙이 좋다가도 부유해지면 교만해져서 신앙에서 떠나게 됩니다. 또 반대로 풍부할 때는 신앙이 좋다가도 좀 어려워지면 신앙에서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자족하지 못하는 두 극단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30: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11절을 보면 바울이 지금 당면한 현실을 잘 대변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어떠한 형편에든지’라는 말입니다.
이 한 마디 속에 바울의 현실과 상황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보낸 옥중서신입니다.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 넷,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라는 도시에 대한 추억.
2004년에 교회를 개척하고 교인 분들과 같이 세 번 성지 순례를 갔는데
그 첫 번째가 2008년 4월에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간 것이었고,
두 번째가 2010년 5월에 그리스, 터키를 다녀 온 것이었고,
그리고 2014년 5월에 이태리를 다녀 온 것입니다.
두 번째 성지 순례 마지막 지점이 그리스의 ‘까발라’(Kavalla)라는 도시였는데, 인구 약 8만 명의 자그마하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입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밤중에 그 아름다운 항구를 거닐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이 작은 항구도시는 기독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까발라가 바로 사도 바울이 유럽에 최초로 발을 들여 놓은 항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1절에는 ‘네압볼리’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사도행전 16:6-10
이 본문은 다섯 절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세계역사를 바꾸어놓는 엄청난 사건, 유럽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 놓은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는 사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미개하던 유럽은 오늘 본문 이후로 기독교를 접하게 되고, 그 후 지난 20세기 동안 세계를 주도하는 시구 문명의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이후에 서양의 운명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전도를 하는데 자꾸만 막혀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드로아, 트로이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환상을 보게 되고 건너가서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이 11절을 보니 네압볼리.
이 네압볼리에서 산 넘어 로마인들이 깔아 놓은 도로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서면 빌립보.
유럽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루디아라는 자주 장사, 세례터.
지금 바울은 로마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 같으면 환경을 탓하고, 사람을 비난하고, 나아가서 하나님도 원망할 상황이었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말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희락의 서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쁨을 말하고, 자족을 강조합니다.
어떤 형편이든지 현실을 수용하는 것에서 자족은 시작됩니다.
이것이 자족하는 삶의 첫 번째 비결입니다.
선택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과 역경 가운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보는 것이 수준입니다.
높은 수준의 사람은 가시밭에서도 백합화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먼저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이 억울한 일도, 불공평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다.
이 믿음이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우리는 자족할 수 없고, 우리의 입에서는
언제나 불평과 원망만이 나올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세상에 아무리 악한 자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줍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부모 된 자의 심정입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좋은 것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계획한 것이 깨어질 때 실망할 수 있습니다.
뜻하지 않는 난관 앞에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살고 땀 흘리며 노력하지만 노력한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중동의 선교사들, 50년 동안 한 명도 전도 못함.
저는 이런 분들이 진짜 선교사, 중동, 인도, 이슬람, 힌두.
예수를 잘 믿고 사는데도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게 될 때도 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변에서 그냥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현실을 수용하고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이런 고백과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실제로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주어진 현실을 잘 수용했을 때,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신 이야기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 노예로 잡혀 가서도,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서도 현실을 수용하고 묵묵히 최선을 다했을 때 하나님께서 요셉을 총리로 만들어 주십니다.
요셉이 자기를 노예로 팔았던 형들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창세기 45:5-8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지금 여러분 가운데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필연적인 인도하심을 기다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여러분을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족하는 삶의 두 번째 비결은 배우는 것입니다.
자족의 비결은 배우고 훈련받고 연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자족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니까 가능했다고 그렇게 덮어놓고 그를 높이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보통 사람입니다.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되면 괴롭고 힘들어 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어려움들을 잘 극복해 내고 자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뼈를 깎는 훈련과 연습을 한 것입니다. 그의 표현처럼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킨 것’입니다. 자족은 저절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배우지 않고, 훈련받지 않고, 자족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신앙은 훈련이요, 연습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4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신앙의 성장은 세월이 흐른다고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 자동으로 되어 질 거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도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훈련 없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습니까? 훈련을 열심히 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메달을 목에 걸고 웃지만, 그 기쁨이 있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눈물과 피나는 훈련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끊임없는 자기 훈련과 연습을 통해 내 몸을 쳐서 복종시켜서 자족하는 법을 배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족하기 위해서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자족하는 삶의 최종 결론입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할 수 없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능력하면, 신비한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은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해야 그것이 능력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정한 능력은 바로 자족의 능력, 즉 절제의 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가진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13절은 11절, 12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능력은 신비가 아닙니다. 바로 자족의 능력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운 것이 능력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자신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 안에 끊임없이 솟구치는 욕심을 버리게 되고,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있어야 모든 어려운 현실들을 원망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받는 방법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1. 단순하고 간단하라. 복잡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함.
2. 꾸준하라.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전혀 부족함이 없이 인도해 주십니다. 신앙 생활은 그런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으로 사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이 악하고 험난한 세상에서 승리하고 자족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하나님의 능력, 성령을 덧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