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만류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동물들은 다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연어를 예로 들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알을 낳고 죽습니다.
이런 것을 회귀성 동물이라고 합니다. 몸속에 있는 나침반을 따라, 태양을 이정표로 삼아 고향을 찾아가는 동물들을 회귀성 동물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연어들은 배우고 듣고 본 것이 아니라 원천적 본능에 끌려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더 높은 차원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양심입니다. 그래서 만유의 영장.
‘양심’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보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치든 안 가르치든, 육법전서를 알던 모르던 우리 마음속에 있는 양심이 그를 인도합니다. 양심이 옳게 작용을 하면 법 없이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성령에 끌려 삽니다.
주께서 주신 말씀과 성령의 감동으로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는 내가 예수 믿고, 내가 예수를 따라가는 줄로 생각을 하지만 얼마간 믿고 보면 그게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믿은 게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믿게 하시고,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놀라우신 주님의 능력과 섭리에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의 그 크신 경륜 속에 내가 쓰여지고 있는 정체의식으로 한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꾸 양심에 털이 날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민족이 있어요. 양심에 털이 났는데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게
문제. 2년 전에 사뽀로, 북해도를 간 적이 있는데 북해도가 일본에 편입된게 불과 150년 정도. 아이누 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점령.
오끼나와도 류큐족이 살고 있었는데 1879년에 점령.
독도에 대해서도 일본땅이라고 주장. 땅만 있으면 침략하고 싶어하는.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역사학도로서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리. 역사를 보면 그 첫 단추가 운요호 사건.
186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다시 고개를 들어 일본은 단계적 침략 전략을 가지고 조선에 접근하였는데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 개혁을 단행한 후, 일본은 조선과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운요호사건을 일으킵니다.
1875년에 영국으로부터 구입한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공격을 가하고, 조선수군을 공격하고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고는 조선을 본격적으로 침략.
1895년 을미사변을 통하여 민비를 일본의 낭인들이 시해하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통하여 외교권을 박탈, 중명전.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그 당시 각 나라들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고.
지금도 일본은 치밀한 계산으로 한국에 대하여 경제적 전쟁을 시작.
지금도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하면서 우리를 자극.
바짝 정신차리고 우리 국민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알려주어야.
해방신학에서 서구의 앞잡이 두 가지, 코카콜라와 맥도널드.
지금 일본의 두 가지 첨병은 렉서스와 유니클로.
유명 논설위원이 IMF 당시 금모으기에 대해서 부정적인 논설을 쓰셨다고.
그런데 그 금모으기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일어선 것을 보고 회개.
지금 우리나라는 온 국민이 하나가 된 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
일본은 지금도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예의 주시하고.
하나 되지 못하면 경제적 전쟁에서 필패.
한일합방도 일본의 치밀한 계산으로 이루었듯이 경제적 전쟁도 그와 같아.
이때 흐물흐물하면 일본은 치밀한 각본에 의하여 다른 침략을 시작.
이번 기회에 일본물품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체질도 개선해야.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기 전에 먼저 아테네를 방문합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만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도하다가 철저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속된 말로 하면 피를 봅니다.
그 후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하기로 작정을 하고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바로 그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그의 지식도 아니요 그의 능력도 아니요
오로지 십자가의 복음을 재발견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아무리 읽어도 너무나 솔직하고 처절한 고백입니다.
바울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아덴에서는 자신의 지식, 지혜로 복음을 전하려다 넘어졌지만 고린도에서 말씀을 붙들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고 말합니다.
‘쑤네케토’ 라고 하는 이 말은 영어로 Occupied, 점령되었다는 겁니다.
완전히 포로되었다. 점령되고 완전히 붙잡힌,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이제는 생각도 의지도 운명도 다 그를 붙잡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결과에 대해서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가라’ 하신 분이 책임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가라하는 말씀을 듣고 가면 그 책임은 나에게 명령하신 그 명령자가 책임을 지는 겁니다. 그런 고로 갈 때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잘될까 못될까 걱정 안합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아시니까요.
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전가합니다. 나는 그저 순종할 뿐이요. 여기에 진정한 용기와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나는 깨끗하니라”라고 합니다.
언제나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His part and my part.
내가 할 일, 내가 다한 다음에는 나머지 일을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을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내가 할 일, 내가 다했으면 나는 깨끗한 겁니다. 당당한 겁니다.
에스겔 33장 1-6절을 보면 전쟁 중에 파수꾼이 있습니다.
파수꾼은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적이 올 때 일어나서 싸우라고 나팔을 불 책임이 있습니다. 나팔을 분 다음에 정황이 잘못돼서 전쟁이 이겼든 졌든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에 지더라도 그래도 나팔을 분 그 사람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이 파수꾼이 졸아서 불어야할 나팔을 불지 않아서 이 때문에 적이 쳐 들어와서 포위하고 그만 이 부대가 전멸했다고 하면 이 모든 책임은 파수꾼에게 있습니다. 나팔을 불지 아니한 책임.
그런고로 성경은 ‘내가 피 값을 찾으리라’고 엄하게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전해야 될 것은 전해야 되고 내가 해야 될 일은 내가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내 할 도리를 다 하면 여기에 진정한 용기와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왜? 나는 손이 깨끗하니까. 내가 모든 일을 다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할 도리만 하면 됩니다. 내가 전할 복음을 전하고, 내가 해야 할 사랑을 다하고
그 다음엔 하나님이 하실 일이요. 그런 고로 나는 손이 깨끗하노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평신도 사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입니다. 평신도가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평신도가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이 평신도라는 말은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교회가 점점 제도화되면서 교회에는 교직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성직자 그룹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성직자 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당시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안이 ‘평신도’라고 부르면서 처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평신도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약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주체는 목회자가 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할 평신도는 잠을 자고 있고, 소수의 목회자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이 짙습니다.
잘못되어도 아주 잘못된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의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개신교의 기본정신이 ‘만인 제사장설’입니다.
목사만이 제사장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그 누구도 제사장, 성직자라는 의식을 가져야합니다.
한스 윙이라는 신학자는 “목사가 교회를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된 성직자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는 성도를 훈련시키는 교관입니다. 교회는 훈련소입니다.
고린도후서 6:1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하고 하면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합니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동역자로서 하나가 되어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가 왜 중요합니까? 평신도는 광범위한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직종을 가지고 일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렇게 사회 곳곳에 흩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교사입니다.
성경 번역이라는 게 많습니다. 이런 번역 저런 번역, 소위 version 이라는 그런 많은 번역이 있는데, 그런데 그는 말합니다. 가장 위대한 번역은 내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다. 내 생활 속에서 성경을 확증해 나가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초대교회가 한 시대를 바꾸는 능력을 가진 것은 모이는 숫자나 교회의 크기, 혹은 성도들의 지식 수준이나 부요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능력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절대적인 헌신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동역함으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일할 동역자란 머리 좋은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돈이 많다고 교회를 잘 섬기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지위가 높다고 해서 교회의 일을 잘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얻게 되는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나는 무엇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입니까?
말씀에 붙잡혀 자유할 때, 말씀을 사랑할 때, 말씀을 기뻐할 때,
그리고 충성을 다하여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우리의 영혼은 기뻐합니다. 그 속에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길은 말씀밖에 없고, 말씀에 붙잡혀 사는 길 외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칼빈이 임종을 맞았습니다. 세상 떠나기 직전에 제자들은 될 수 있는대로
귀한 말씀을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모여 앉았습니다.
아직도 그 의식이 분명할 때에 제자들은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로부터 배운 예정론에 대해서 잘 납득이 되지를 않는데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칼빈은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Bible said so.”
성경이 그와 같이 말한다, 성경말씀에 충실할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성경을 사랑했습니까? 얼마나 성경말씀대로 살았습니까?
말씀에 붙잡혀 사는 바로 그 사람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