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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교회에 도입해서 쓰는데, 인본주의적인 면이 들어가다 보면 문제점들이 발생하곤 합니다. .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려면 먼저 초대교회와 같이 말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초대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설교와 예배로 돌아가자는 말과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을 2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가 설교, 그리고 두 번째로 성례전을 이야기 합니다.
기독교의 성례전에는 성찬식과 세례 2가지가 있습니다. 거룩한 예식인 성례전이 중요한 이유는 복음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성찬식을 일 년에 세 번, 부활주일, 한가위, 성탄주일,
세례식은 한 번. 세례는 카톨릭과 대부분의 장로 교회.
성경적으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습니다. 유럽 최초의 교회 빌립보에 가면 루디아와 그의 식구들이 침례를 받았던 침례터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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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은 복음의 내용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 같이 읽읍시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의 위대한 점은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에 있습니다. 특별히 나를 위하여 그 이유는 죄인인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전기나 자서전, 또는 영웅전을 읽어보면, 그들의 활동과 쌓은 공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다른 유형의 자서전이나 전기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특색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다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속죄 제물로 자기 목숨을 내놓으시고 그 죽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해 주시기 위함.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렇게 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 여기에서 인도(프로사고)는, 왕을 만나 뵈려고 오는 사람을, 왕 앞으로 인도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왕 되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은 실제로 돌아가셨다. 잠시 기절한 것이 아니다.
19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난해 구절이라고 합니다.
우선 이 구절은 로마 카톨릭에서 연옥을 주장하는 근거.
그래서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공덕을 쌓는 행위로, 그들을 구원한다고 하면서, 많은 돈을 거둬드렸다.
그렇지만 성경은 사후의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옥에 있는 영들은, 20절에 “그들”로 표현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그들은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죽었던 무리들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옥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아니라, 약속대로 죽으시고 승리자가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20下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넘쳐나는 물, 넘쳐나는 홍수 속에서, 노아는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방주를 통해서 구원받았습니다. 방주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음과, 몇 가지 동질성이 있다.
창세기 6장 14절 전반부를 보면 방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어.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노아가 방주 지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방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하나님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고, 문을 닫으셨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방주 속은 안전했습니다.
홍수가 나서 아무리 범람하여도, 방주는 물 위에 떠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의 안전을 대변해 줍니다.
이사야 43:1, 2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화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70장
창세기 6장 14절 하반부를 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하였다.
고페르(집에 거한다) 나무와 역청(코페르)을 칠하라고 했다.
역청은 타마구,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도록 만듭니다.
죄를 지어도, 주님을 떠나지 말고, 부인하지 말라.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소개한 악한 친구들하고는 같이 어울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면 됩니다. 안 속아!
믿음은 반석이라 했습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리는 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작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절대로 유혹에 흔들리지 마시고 말씀 위에 견고하게 서시어 오직 주의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언제 불러 가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을 때 주의 일에 힘쓰는 일입니다. 그렇게 살아생전 숨쉬며, 오직 새 생명 가운데 행하며, 주의 일 열심히 하다가, 죽어 세상 떠날 때 만세 반석 열린 곳에 다 들어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1절은 세례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를 통해, 신령한 구원의 표인, 세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세례의 모형이라고 한다.
세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에 대한, 외부적인 증거요, 확인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유니버살 처치의 일원이 됩니다.
세례는 머리에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며, 죄를 씻는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22절을 읽습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니라”
침례를 받으신 주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주님께 복종한다. 이처럼 구원받은 우리는, 영생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하며 행복하게 살게 됨을 상징합니다.
베드로전서는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책입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이 세례를 받았다면 다시 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연합되었다는 감격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이제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닙니다.
나의 옛 사람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하여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새 사람입니다.
이제 후로는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아름다운 인생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