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비밀, 골로새서 2:1-3, 96장
열왕기하 1-7장
남북 왕국이 멸망하기까지의 역사를 기록
722년 앗수르, 586년 바벨론
2차 대전이 끝나고 10년쯤 지났을 때, 한 독일인 남자가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합니다. “신부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2차 대전 동안 유태인 한명을
저희 집 지하 골방에 숨겨주었습니다.”
“형제님,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 받을 일이지요”
“하지만 그 사람으로부터 숙박비를 계속 받아왔습니다.”
“음... 그것은 좋은 일은 아니지만, 죄를 진 것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말씀하세요” “그 유대인에게 전쟁이 끝났다고 얘기를 해줘야 할까요, 말까요?”
웃지만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앞에서는 속수무책.
부동산도 안정이 되어야 하지만 내 집 값 올라가면 미소, 떨어지면 난리.
아무리 환경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 속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망일 것입니다.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었던 것은 그 암울한 시대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꿈꾸던 소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비밀이란 헬라어로 ‘무스테리온’입니다. 이 말이 영어로 옮겨져서 ‘미스테리(mystery)’가 됩니다. 신비, 비밀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신비라고 하는 그 사실이 그대로 사실이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는 모든 것이 신비롭습니다.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비밀을 하나하나 깨달아 나갈 때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라는 것은 그대로가 자연스럽고 그대로가 사실일 뿐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볼 때에는 모든 것이 신비롭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신비의 세계가 우리에게는 마치 너울을 쓴 것과 같아보였는데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너울이 벗겨지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울 서신에서 소위 ‘바울의 기독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골로새서 1장 15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가리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라고 말씀합니다.
‘형상’이라고 하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에이콘’입니다.
이 말에서 유래한 것이 컴퓨터 화면의 ‘아이콘’입니다.
그리스에 가면 그리스 정교회 교회의 내부는 온통 그림으로 가득 장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사도에 대한 그림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아이콘’이라고 합니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있는 그림들도 ‘아이콘’입니다.
교회사적으로 설명을 드리자면 로마제국은 AD 395년에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서로마제국의 수도는 로마이고 거기서 발달한 것이 카톨릭인데
거기서는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합니다.
반면에 동로마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이스탄불인데 거기에서
발달한 것이 정교회입니다. 정교회에서는 성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상은 우상이다 하고 부정합니다. 대신 거룩한 형상에 대한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그것이 ‘아이콘’입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둘 다 부정합니다.
성상이든 그림이든 다 잘못된 것이다 하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덜란드 교회에 가서 보면 성당에 있던 성상들을 다 파괴하고 매끈하게 십자가도 없이 해 놓았다가 지금은 겨우 십자가만 장식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상을 인정하는 쪽은 카톨릭이고 아이콘을 숭상하는 쪽은
정교회이고 그 둘 다 안된다, 어떤 상이든지 상을 숭상할 수 없다 하는 쪽이 개신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이콘이라고 말씀합니다.
성화나 조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의 말씀, 그의 역사성,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하나님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이요 중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깨달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2절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라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헬라어 ‘에피크노시스’는 보통 귀로 듣는 지식이 아닙니다.
논리적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체험적 지식입니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지식을 가리킵니다.
깨달음, 아주 중요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병 고치셨습니다,
문둥병자가 깨끗해졌다고 할 때는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 속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실패하고, 낙방하고, 병드는 사건 가운데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배우고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 일생의 과제입니다.
453장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특별히 그 핵심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요 표지입니다.
옛날 로마시대에는 십자가형이 죄인에게 행하던 가장 극악한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십자가 형틀이 기독교에서는 영광의 상징으로
의미가 바뀝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역설, 아이러니가 있는 것입니다.
서양에 가보면 우리는 무덤 앞에 꽂혀 있는 십자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무덤입니다’라는 뜻으로 묘비대신 나무 막대기로라도 만들어 꽂아놓은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렇듯 십자가는 무덤의 상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영광된 것으로 그 의미가 바뀌면서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여인들의 목걸이나, 반지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십자가 속에 더블 이미지가 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죄의 무게를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값을 치르지 않고는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 내가 그토록 큰 죄인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십자가를 말합니다.
또 하나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 내 생의 가치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값을 지불해서라도 구원해 낼만한 가치 있는 존재, 그 엄청난 값이 십자가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칼 바르트는 ‘아르키메디안 메소드’라고 하는 상징적 용어를 씁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있지요?
가령 내가 목욕을 하려고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았다고 합시다.
거기에 내 몸이 들어가면 물이 좌악 넘쳐나갑니다.
그리고 내 몸은 둥실 뜨듯 가벼워집니다. 부력을 받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물 속에 있는 부분과 같은 체적의 물이 넘쳐나가고,
넘쳐나간 그 물의 무게만큼 내 몸이 부력을 받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물리학자 아르키데메스가 이러한 원리를 발견하였기 때문에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백만 원짜리 물건이면 아깝지 않게 백만 원을 주고 그것을 가져옵니다.
왜? 백만 원 가치가 있으니까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내가 십자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따라 내가 기독교인이냐 비기독교인이냐가 가름됩니다. 신앙의 성장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의 바른 의미를 깊이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음 없는 눈으로 본다면 완전한 실패입니다.
서른세 살의 아까운 나이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어간 예수, 남긴 것 하나 없이 그대로 죽어간, 한 개인의 생으로 말하자면 완전실패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십자가의 죽음은 승리입니다.
죄와 사망과 율법을 뛰어넘는 승리요, 믿음의 승리, 하나님의 의의 승리,
생명의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구약에서의 오랜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동안 상징적으로 벌어졌던 많은 제사, 그 예표가 오늘에 와서 실제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수없이 힘있게 반복적으로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여’
말씀이 성취되어서 오늘 이 사건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게 하면)
예수께서는 예언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자원적입니다.
도망가다가 잡혀서 지신 십자가가 아닌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자원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쓸개 탄 포도주도 거절하십니다.
쓸개탄 포도주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입니다.
술기운으로 잠깐이나마 고통을 덜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예수님은 거절하십니다.
맑은 정신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시겠다는 뜻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가지고 지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깨끗하고 맑은 정신으로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이 기도대로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겨 버리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것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요 철학이 아니요 관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특별히 자기 희생이라고 하는 행동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사랑은 가짜
사랑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죄인인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의인이 죄인의 모습으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은 생전에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신학을 네 단어로 제자들에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Jesus died for me.’ 이것이 나의 신학의 전부다 하고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십자가는 하나님의 이적 중에 이적입니다.
그 속에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아이콘입니다.
그 비밀의 베일을, 하나하나 벗겨가면서 감격하고, 감사하며
이 어려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