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의 신비, 마태복음 7:13-14, 456장.
아가 6-8장, 룻기 1-4장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 6, 7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 즉 5:1-7:12까지가 본론 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무저항주의의 기본원리를 따 온 곳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5:39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특히 12절은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지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 원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2절에서 ‘황금률’을 제시한 예수님께서는 이제 13, 14절에서는 우리들이
살아 가면서 하여야 할 선택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제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선택을 존중해 주십니다. 분명히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도 우리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 생활은 선택입니다. 이제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런데 올바로 선택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많이 하는 질문
“이것을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집을 팔아야 될지 말아야 될지,
회사를 끝까지 유지해야 될지 지금 정리해야 될지, 하나님께서 ‘이것이다.’라고 확신만 주신다면 저는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왜 하필이면 좁은 문입니까? 성경을 읽어나가다 여기서 걸립니다.
예수 믿어 복 받고, 예수 믿어 잘 살고, 예수 믿어 병 낫고, 예수 믿어 하늘 나라 간다고 하니까 ‘그것 참 좋은 이야기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니까 ‘어? 얘기가 좀 틀려지는데’라고 하다가 마태복음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십니다.
우리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이것은 좁은 문이로되 들어갈 수 있도록 열린 문입니다. 못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쉽지는 않아 보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이 문은 아주 좁습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은 고독한 문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살아가고 다 넓은 길로 살아가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고독한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앙이 좋은 유대인이 하루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잘 기른 신성한
산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제단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양을 본 세 명의 못된 사람들이 어떻게든 산양을 빼앗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들은 강제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유혹해서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우선 한 사람이 그 유대인 앞에 다가가서 이렇게 말을 겁니다.
“여보시오! 제물로는 양을 바쳐야지 어떻게 이 더러운 개를 제물로 드리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유대인은 펄쩍 뛰었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건 깨끗한 산양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 길을 가는데 또 한사람이 다가와서 묻습니다.
“지금 그 더러운 개를 제물로 바치려고 하십니까? 깨끗한 양을 제물로 드려야지 더러운 개를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유대인은 다시 정색을 하고 산양을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보시오. 이것은 개가 아니라 산양이오.”
조금 더 걸어가노라니 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역시 같은 말로 물었다. “여보시오! 정결한 양을 제물로 바쳐야지 어째서 더러운 개를 바치려 합니까?”
세 번째 똑같은 말을 듣고 다시 찬찬히 산양을 살펴보니 정말로 개로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만 내버리고 갔더랍니다.
뭇사람의 이 소리 저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때로는 절대적으로 고독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오직 홀로’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어렵사리 결단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계속해서 협착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서 보니 또한 그 좁은 길이 계속해서 이어져 있더란 말입니다.
힘들고 어렵게 선택했으면 당장 그것에 걸맞은 보상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힘겨운 선택을 했지만 여전히 힘이 들어서 선택한 뒤에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광고를 참 잘하긴 하는데 나이가 드니 못 알아들을 것이 점점 많아 집니다.
참 잘했다고 생각드는 광고가 오늘 하나 떠올랐는데 타이멕스라는
시계 광고입니다.
시계를 비행기 위에서 떨어뜨립니다. 트럭으로 깔아뭉개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계를 바윗돌에 던지기도 합니다.
결국 시계는 깨지고 망가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계가 가고 있습니다
광고 마지막 멘트가 이것이다. “타이멕스, 그래도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래야 합니다.
한번 결정한 것은, 한번 선택한 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가야 합니다.
작심 삼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 상황이 어렵다고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사업이 어려워졌다고, 건강상 문제가 생겼다고,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겼다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그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여호수아 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하나님께서 모세가 죽은 뒤에 여호수아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 자기들의 발바닥으로 밟아야 자기들 차지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는 가나안 7족속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셨지만 그 약속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입으로 “아멘”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옥스퍼드 대학에 가면 러스킨의 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러스킨이 어느 날 옥스퍼드 대학에 강의하려고 가고 있었는데 비가 오고 길이 좋지 않아 흙탕물이 옷에 튀어 곤란을 겪었습니다.
강의실에 도착한 러스킨이 옷을 털며 학생들에게 말했다. “강의실에 오는 길이 좋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학생들은 “그야 당연히 길을 고쳐야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러스킨이 말했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나가서 길을 고칩시다.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러스킨 교수의 말에 따라 학생들은 모두 나가 길을 고쳤고, 그 후 그 길은 실천을 중요시 한 러스킨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러스킨의 길’이라고 이름 붙여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깨달았으면 실천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심정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에 대하여 어느 만큼 긍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왕 그러셨으면 가나안으로 훌쩍 옮겨놓으실 것이지, 어째서 40년이라고 하는 그 긴 세월을 광야에서 헤매도록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정말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가나안 복지를 소원합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을 통과하기는 싫어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복지는 광야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섬세하신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광야 생활에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3, 4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 끈기를 배웁니다. 환난은 우리를 끈기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환난을 통해서 사람이 강건해 집니다.
추우면 추운대로 견디고, 더우면 더운대로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헬라어로 ‘도키메’라고 하는 이 말은 본디 ‘성품’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연단’을 ‘character’라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사람 되게 함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 못된 성격을 바로 만들기 위해서는 환난이 필요합니다.
이것 없이는 온전한 성품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환난과 역경과 시련을 통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과 역경 속에서, 필요없는 것들 다 제하고, 버릴 것들 다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깨끗하고 영원하고 순수한 참소망의 사람의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순수한 소망은 환난을 통과 한 후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참 소망을 가진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즐겁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보람차고, 생각할수록 예수 믿기를 잘했다 싶습니다.
더욱 더 큰 기쁨에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입니다.
본문은 다시 14절에서 ‘찾는 자가 적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의 뜻은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 아니라 정작 이 문에 들어가는 사람이 적다는 말입니다.’
생각은 하지만 결국은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들어가야 되겠다고 결심은 합니다. 그러나 못 들어갑니다.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려면 버려야 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정해야 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못 들어갑니다.
이것은 분명히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자유합니다. 끊어버릴 것은 다 끊어 버리고, 잊어버릴 것은 다 잊어버리고 부인할 것도 다 부인해 버렸기 때문에 단순합니다.
신앙인들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남들이 뭐라 해도 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남들이 다 해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할까 말까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 저것 재보지만 믿는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생명의 길은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은 좁은 길이요, 그리스도인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결코 불행한 길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길이요 행복한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통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후회 없이 주와 같이 좁은 길, 그러나 자유의 길, 소망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