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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스데반(사도행전 7:54-60)

 

 

    순교자 스데반, 사도행전 7:54-60, 457장

 

잠언 7-13장

 

잠언에는 참으로 좋은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행해야지만 내 것이 됩니다. 

비만이라는 것이 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넋놓고 있으면 내 몸에 딱 달아 붙어서 잘 떨어지질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포기하게 만듭니다. 

살이 찌니까 점점 살 뺄 자신이 없어지고 해도 안될 것 같아 시작도 못하게 만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시작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면서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아닌 집사였지만 스데반은 성령 충만함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말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 충만’의 충만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플로레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곧 체험적 신앙을 뜻합니다. 체험하고 나니까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다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이성적 비판의 충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기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세상도 이기고, 자신의 나약함도 이기고, 슬픔과 탄식도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사람의 극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해 집니다. 

 

오늘 스데반의 이 순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의 뜻이 무엇인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합니다.

여기 '찔렸다' 헬라어로 '디에프리온토'라는 이 말을 직역하면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박혔습니다. 

주의 말씀이 화살같이 그 마음에 꽂혔는데, 이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게도 이를 갈았어요. 이를 갈 뿐만 아니라 그 다음절에 보니까 귀를 막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 얘기만 하려는 거예요. 듣는 마음이 없단 말입니다. 오늘 이 산헤드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잘못을 지적 받았을 때 두 부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한 부류는 그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반대로 다른 부류의 교만하고 거짓된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지적 받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기보다 자기의 잘못을 지적한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 사람을 원수처럼 생각합니다. 그 사람에게 분노하고 공격합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로부터 자신의 죄를 지적 받았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죄인입니다." 그 때 다윗의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다윗이 실수하고 잘못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향해서 이를 갈며 성 밖으로 내치고 돌을 던졌다 합니다. 

여러분! 이 대목을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왜 예수님의 수제자 사도 베드로가 아닌 스데반 집사입니까?

왜 사도도 아닌 집사 스데반이 먼저 죽느냐, 순교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람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저 ‘갈릴리 촌사람’이 아니고 헬라파 유대인이요 지성인, 당시로 말하면 세계 문물을 두루 꿰고 있는 사람입니다. 식자층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고 복음을 전할 때 같은 동료, 왕년에 같은 친구였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여기서 용납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들이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돌을 던져 스데반을 때려 죽이는 순간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들이 바로 엊그제까지도 친구였던 사람들입니다.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돌을 던집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데 이에 대한 스데반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본문에 보는 대로 그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땅을 보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세상 앞에 목숨을 구걸하지도, 구차하게 애걸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을 조롱하고 비난하며 돌을 던지는 자들 앞에서 56절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여기 보십시오. 지금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에게 '보라'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보라'는 말은 헬라어로 '이데테'(idete)인데 이 말은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을 가리킬 때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충만하니까 예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등장하는데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고 얘기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님이 일어서 계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벵겔이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스데반을 환영하기 위해 일어서셨다는 겁니다. 그의 순결을 보고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예수님은 앉아서 그를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 예수님은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 스데반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같이 공부하던 같은 길을 가던 동지들입니다. 그런 동지들을 향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네가 나에게 돌을 던지다니’ 이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건 어떤 상황에서든지 먼저 위를 보십시오. 

위를 보는 것, 그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기본자세입니다. 골로새서 3:1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십니다. 위의 것입니다.

먼저 눈을 들어 위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여러분들 지난 날을 생각해 봅시다. 그때 그 사건, 내가 억울하게 당했던 그때 그 사건,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그 때 그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날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이란 오늘도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이것이 

다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모르나 그분은 아시고, 나 또한 언젠가는 오늘의 고통의 뜻을 확연하게 아주 확연하게 그 고통이 유익했다고 하는 것을 간증할 때가 올 것입니다. 왜? 나에게 당한 고난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나만을 향한 특별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납득이 되십니까? 납득이 되시는 분은 감사하고 납득이, 이해가 안 되시는 분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당하는 길을, 내 운명을 그가 아십니다. 

그래서 내가 이 고난을 겪은 다음에 순금같이 나올 것입니다. 

그 아침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크리스찬인 것입니다. 

 

여러분, 뭐니뭐니해도 걱정치고 가장 큰 걱정은 죽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감기만 걸려도 ‘이러다 죽지 않을까’하고, 종합검진을 갈 때마다 ‘또 무슨 중한 병은 걸리지 않았나’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스데반은 주님을 우러러 봅니다. 

자기를 기다리는 주님을 쳐다보면서 그에게 생명을 위탁합니다. 

그러면서 죽음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합니다. 죄의 문제, 불안과 공포의 문제, 세상에 대한 미련, 다 접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total commitment, 자기 자신을 완전히 위탁해 버렸습니다. 

여기서 그는 영혼의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평안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 그 원수들을 용서합니다. 용서할 뿐 아니라 원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가끔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할 때 ‘원수를 사랑하다니, 원수를 어떻게 사랑해? 그건 특별한 성현들이나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한단 말인가?’하고 말하기 쉽습니다마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들에게는 사랑과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에는 오로지 투쟁만이, 싸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쟁취만이 혁명만이 있습니다. 그런 공산주의는 결국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왜? 저 복수심 때문입니다. 그 미워하는 마음, 저주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고야 내가 살 수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미워합니까? 미워하고 있는 동안은 ‘나’라는 생명을 내가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도 내 진실도 내 소중한 건강까지도 다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벗어나십시오. 조금이라도 누구를 미워하는 그림자가 있거든 빨리 벗어나십시오. 거기에 매여 있으면 그 저주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야 내가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60절을 보세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릎을 꿇었다고 본문은 얘기하지 않습니다. 

언제 꿇은 겁니까? 뭇돌에 맞았어요. 이미 육신은 깨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정신은 혼미해집니다. 이제 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순간에, 끝이라고 판단되는 그 순간에 스데반이 무릎을 꿇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군중의 고함소리와 온갖 저주, 그 수많은 돌 세례 속에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이것이 하루아침에 가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번도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 친구들이 돌을 던질 때에, 마지막 죽어 가는 순간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스데반은 늘 기도했습니다. 늘 언제 어디서든 기도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도 그는 평소에 기도하던 모습대로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용서의 기도입니다. 지금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 이런 기도가 과연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 어떻게 죽고 싶습니까?

사람은 잘 죽어야 되겠습디다. 제때에 근사하게 죽어야겠습니다.

이게 잘못되면 한평생 수고한 거 다 망가지고 맙니다. 

여러분, 오늘 스데반의 저 장엄한 순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주님의 영접을 받는 저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습니다. 

확실히 젊었을 때는 예쁜 것이 있습니다. 더 예쁘고 덜 예쁘고 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 한 60쯤 넘고 보면 다들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다 비슷합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밝은 얼굴과 어두운 얼굴입니다.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밝으냐 어두우냐의 차이는 확실히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형외과가 손을 못 대는 부분입니다. 

왜? 이것은 내면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결국은 밝은 얼굴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자유하면 마음이 천사가 되고 얼굴도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오직 밝은 마음과 천사의 얼굴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성령 충만은 성령 충만하려고 애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다보면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어야 합니다. 

이 힘들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진리를 향해서 야유하고 조롱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다 보면 자연히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담임목사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단순하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나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무언가 달라졌다는, 그래서 빛이 난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해 짐으로 이 공정하지 못하고 상식적이지 못한 이 세상을 

이겨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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