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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세기 32:22-32)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 32:22-32, 338장.

 

사도행전 7-13장

 

사람들은 보통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돈이 많아져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지는 것도 복은 복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은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형편없었던 내가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참으로 근사하고 훌륭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우리들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리고 타락하고 부패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비겁합니다. 정직하지 못합니다. 추합니다. 욕심 사납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복음 중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함 받게 되었습니다. 

시험을 보다가 답을 잘못 적으면 선생님이 다시 답안지를 주시듯, 그림을 

그리다가 망친 학생에게 선생님이 다시 새 도화지를 주시듯, 죄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생을 망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라 하십니다.

신앙생활이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작업인 것입니다. 

사단에게 속지 마십시오. 다 틀렸다고 합니다. 자포자기하게 합니다. 

 

다윗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밧세바의 남편이요 충성스러운 

부하였던 우리야를 비열한 방법으로 죽여 버리고 맙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죄를 지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용서하심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워서 시편 32편 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 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사도 바울에게서도 다윗과 같은 고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아멘.

여러분들은 새로운 피조물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요즘 신문을 보면 유난히 ‘발목 잡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보면 “고유가에 발목 잡힌 한국경제,” 

“국회의 입법권을 발목 잡는 대통령의 거부권” 

제가 굳이 설명 안 해도 무슨 뜻인지 다 아실 겁니다. 

이렇게 우리말에서 ‘발목 잡는다’는 말은 어떤 것에 꽉 잡혀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런 남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야곱입니다. 

이 ‘야곱’이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발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남의 것을 빼앗는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바로 이 이름의 이름값을 하는 인생을 삽니다.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창세기 25장 24절에 보면 이삭과 리브가 부부가 쌍둥이를 해산하게 되는데 먼저 태어난 형은 온몸이 붉고 털이 많이 나있어서 ‘에서’라고 지었고 

나중에 태어난 동생은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기에 ‘야곱’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보통 쌍둥이는 불과 몇 분 차이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불과 몇 분 차이로 형과 동생이 결정되는 것도 억울한데 더욱이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장자, 즉 맏아들이 부모의 축복권을 모두 차지하게 되어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목을 잡고 태어나더니 자라면서도 번번이 형 에서의 발목을 잡습니다. 형의 배고픔을 이용하여 장자권을 형으로부터 팥죽 한 그릇에 사더니 급기야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늙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챕니다.  

형의 분노와 복수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서도 삼촌이자 장인인 라반과 치열한 머리 싸움 끝에 좋은 양들을 다 차지합니다. 

이렇게 야곱의 인생은 늘 자기의 이득을 위해 남을 속이거나 남의 자리를 차지하는, 한 마디로 남의 발목을 잡는 인생이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삼촌 라반의 집에서 많은 재산과 가족을 얻은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형을 피해 맨몸으로 라반의 집으로 도망했던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누가 걱정이 되겠습니까? 게다가 형은 혼자가 아니라 사백 명이나 되는 부하를 거느리고 자기를 만나러 온다고 합니다. 

“틀림없이 나와 가족들을 해치고 재산을 빼앗아 옛날 당한 일의 복수를 하려는 속셈일 거야”라고 판단된 순간 야곱은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이 많은 가족과 재산을 한꺼번에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커다란 공포심이 

야곱을 짓누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밤에 일어납니다(22절). 그리고는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들은 얍복나루를 건너게 하고 자신은 홀로 남습니다(24절).

홀로 남았다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실상 홀로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홀로 남습니다. 

우리는 홀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홀로 지내야 하는 고독한 존재이며, 마지막에도 반드시 홀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내가 믿어야 하고, 나의 죄 문제도 내가 털고 가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하나님 앞에서 홀로 대면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 밤에 홀로 남은 야곱이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바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었습니다. 

호 12:3-4에는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이 밤에 어떤 사람이 와서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였습니다.

사실 24절을 잘 보면 야곱이 먼저 어떤 사람을 붙잡고 씨름한 것이 아니라, 그 날 밤 어떤 사람이 와서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날의 모든 주도권은 야곱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잡고 있었습니다. 낙심한 야곱을 찾아오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용기를 주시려고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 생길 때 흔히 범하는 실수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 문제 자체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도 먼저 그 문제 자체와 씨름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바로 형 에서에게 잘 보이려고 뇌물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편법을 쓰거나 불법도 거침없이 행합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남과의 관계가 어려워지면 그 사람하고 맞붙어 싸워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 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다가는 오히려 그 사람과의 관계가 더 어려워 질 때가 훨씬 많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려운 문제, 꼬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 문제 자체와 

씨름하지 말고 하나님과 씨름하라고 합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길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충고한다고 합니다. 

내려가려고 애쓰지 말고 위로 올라가라, 

높은 데 올라가서 다시 내려다보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그 다음에 내려가라, 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에 매여 현실문제에만 급급해서는 해결이 안됩니다. 높은 데로 올라가서 이 세상을, 나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해야 할 작업들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낮은데서 바라보던 시선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6절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은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말합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란 이름은 형 에서의 발목을 붙잡고 이어서 태어났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말은 나는 욕심쟁이요, 나는 사기꾼이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사람은 새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본문 28절 말씀에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새 사람이 되라고 이름을 바꿔주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었고, 사울이 바울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육체의 욕망,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던 우리에게 주님은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만날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했지만 하나님은 씨름에 이긴 야곱에게 단순히 그 문제만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 야곱의 인생을 바꾸어 주시고 그의 미래를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29절에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대신 축복해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했는데, 구약시대에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30절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브니엘이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의 손만 바라보고, 축복하시는 것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은총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새 이름이 지닌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 야곱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가 엄청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이 축복을 받아내기 위해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비싼 값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25절.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일은 한 사람에게 일어날 커다란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제부터 그의 삶을 주동하는 에너지는 야망이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입니다. 180도 전환입니다. 

야망과 탐욕으로 얼룩진 낡은 인간의 삶이 끝이 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이 탄생한 것입니다.

생사가 걸린 얍복강 나루터의 긴 밤의 기도는 끝이 나고  옛사람의 옷을 벗고 믿음으로 거듭난 위대한 하나님의 새사람이 탄생했습니다. 

브니엘의 찬란한 아침햇살이 온 누리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이전의 질서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 세계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감동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31절을 주목해 보도록 합시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일일이 지명하여 불러낸 자들입니다. 

우리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줄 알고 내 능력을 의지하고 큰 소리 치며 살아가던 방자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우리들이 내 인생을 내가 마음대로 handle할 수 없음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두 손 두 팔 들고 항복하여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태도가 항복한 사람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힘을 빼셔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힘을 빼는 것이 기본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험한 골짜기를 울면서 지나가지만 그 한 방울 한 방울의 

눈물들이 기쁨의 샘물이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써 저 멀리 바라보이던 하늘 나라가, 그 새하늘과 새땅이 고난을 통과한 여러분 앞에 펼쳐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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