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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망 안에서(에베소서 4:1-4)

  

   한 소망 안에서, 에베소서 4:1-4, 412장 

 

누가복음 17-23장

 

지금으로부터 약 52년 전, 1972년에 미국을 처음 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미국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신기해 하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South Korea에서 왔다고 하면서 South와 North 중에 어디가 더 좋으냐고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난감해 하면서 하는 대답이 둘 다 좋다 그럽니다. 그 대답에 제가 너무 놀랐습니다. 

당연히 저는 South Korea가 좋다고 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어떤 할머니가 South Korea가 좋다고 하시면서 제 손을 잡고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 너희 나라에 참전해서 전사했다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1950년 6월 25일, 그날은 바로 주일이었습니다. 주일날 전쟁이 터졌습니다. 군인들과 공무원들이 쉬고 있는 그날, 휴가가고 없는 그날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렇게 일어난 전쟁으로 사상자가 무려 520만 명, 이산가족이 1000만, 유엔군만도 15만 명이 이 땅에서 죽었습니다.

6 25동란, 그것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그 누구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전쟁은 인간의 욕심과 오판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은 변명의 여지없는 죄악입니다. 전쟁은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도 막아야 합니다. 전쟁은 절대로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오직 평화적으로 협력하여 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독일에 바이츠체커라고 하는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198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 40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깊이 새겨들을 말입니다.“과거에 대해서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눈이 멀게 됩니다.” 

여러분, 과거에 매이면 미래가 없지만 그러나 과거를 잊으면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여러분, 과거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가난했던 때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병들었던 때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실패하고 낙심하고 미래가 캄캄하게 보이던 그때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경험한 것, 뼈아프게 경험한 것,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깨달은 것, 이거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실은 사람에게 있어서 경험한 것만 내 지식으로 남는 것입니다. 

건망증 환자가 누구입니까? 경험이 아무 소용없는 사람입니다. 

잠언 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여러분, 6 25전쟁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 6 25전쟁을 통해서 ‘이념’이라고 하는 것,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줄을 배웠습니다. 

이념이 사람을 이렇게 바꾸는 줄 몰랐습니다. 우리는 그저 민족이요, 사랑이요, 화평이요 하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김 구 선생님도 ‘아, 민족이면 그만이지 이념은 무슨 이념이냐’하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서 김일성을 만났는데, 만나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이념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줄 몰랐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공산주의자들과도 손을 잡고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딱 되고 보니 정신이 버쩍 드는 것입니다. 

민족 위에 이념이 있었습니다. 이념이 이렇게 만듭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이 이념에 한 번 탁 걸려들면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전혀 딴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우리는 6 25전쟁을 통해서 비로소 경험하였습니다. 

여러분, 6 25전쟁이 우리에게는 ‘전쟁’입니다만 북한에서는 절대로 ‘전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국토통일을 위한 ‘해방전’ 민족통일을 위한 ‘해방전’이라고 합니다. 저들은 지금도 남한 사람들이 ‘미제국주의’라고 하는 외세 때문에 미국의 노예가 되어서 고생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들을 미국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자, 몇 몇 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 저 지배 계급으로로부터 해방시키자, 그래서 ‘해방전’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가슴 아파할 일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되지 아니하면 나도 불행하고 저도 불행합니다. 우리 모두가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되어야 할 줄을 알면서, 그렇게 외치면서 그렇게 노력하면서 왜 안되느냐, 이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됨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되려고 노력할 것 없습니다. 본래가 하나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질로 돌아가 짚어 보아야 합니다. 

근본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존 그리샴이라고 하는 분이 가정 문제에 대하여 쓴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요지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처음 만나 눈이 맞았을 때, 사랑하고 한창 좋을 때에는 오히려 서로가 다르다는 것에 매력을 느낍니다. 

다르기 때문에 좋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이르면 남자는 여자보고 

‘날 닮아라’하고 여자는 남자보고 ‘왜 여자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서로가 나를 닮으라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사실 남자와 여자도 같은 게 훨씬 더 많고 다른 것은 몇 가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이가 좋을 때에는 같은 것이 많이 보여서 서로 하나되기 쉬운데 사랑이 식고나면 이제는 다른 점만 부각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조그마한 차이에 매여서 그 소중한 동질성을 다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서로 괴롭히면서 살아갑니다.

동질성,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누가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라

 

우리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순간부터 하나 됨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다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나는 공로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주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고, 잘난들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다 같은 죄인이요, 모두 지옥 갈 사람인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사실만 확실히 깨닫고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만 있습니다. 지금 믿는 사람과 앞으로 믿을 사람.

 

여러분들 죽어서 무덤 크게 하고, 묘비 굉장하게 하고, 이 무슨 쓸데없는 짓입니까? 생각해 봅시다. 묘비가 크건 작건 무덤이 크건 작건 그 속에는 똑같이 썩은 시체 아니면 화장한 뼈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입니다. 

돈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 동일합니다. 

 

여러분, 로마 제국이 얼마나 엄청난 나라였습니까? 그런데 기독교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게도 핍박하던 기독교를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인정하게 되고 392년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 공로자가 둘 있습니다. 

그 하나가 노예요, 다른 하나가 여성입니다. 로마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습니다. 로마사람의 눈에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팔고 사고 죽이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나의 물건이요 동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노예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자 통제 불가능이 됩니다. 곳곳에서 노예 폭동이 일어나 주인에게 반항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이 크리스찬 노예들이 주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에 주인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이 기도하는 노예들의 힘이 대로마제국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여성입니다. 그 옛날 여성의 위치란 죄송하게도 형편이 없었습니다. 인구조사를 할 때도 여자는 셈에 넣지 않았습니다. 남자의 부속품으로 취급하여 남자만 머리수로 쳤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서는 다 같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똑같은 형제자매로 보았습니다. 당시의 여성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비로소 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사정은 우리나라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어느 교회를 가나 여성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천대받던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같이 대하시고 정신병자까지도 아브라함의 딸이라 부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몸파는 여자라고 사람 취급 안하던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자도 사랑하시고, 부활하시어 제일 먼저 그를 만나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하나됨의 세계관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것은 곧 하나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합니다. 벌써 하나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됨을 깨닫고 하나됨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상대방을 향하여 긍휼,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의 기본은 거룩인데 유대인의 거룩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분명하게 구별되고 다른 인종들과 분리되는 것을 통하여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연민 때문에 이 분리와 구별을 넘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연민의 헬라어 뜻은 내장입니다. 

즉 내장이 끊어질 듯한 아픔을 느끼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잘 표현한 영어 단어가 compassion입니다. com은 ‘함께’라는 뜻이고, passion은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compassion은 함께 아픔을 느끼되, 정말 내 애간장이 녹는듯하게, 내 내장이 끊어질 듯한 그런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돌아온 탕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연민을 이야기합니다. 

연민은 아파하는 것들과 함께 아파하는 가슴을 뜻합니다. 

아파하는 생명을 보면서 저건 죄인이야하고 정죄하거나 인생을 제대로 못살았으니까 저 모양 저 꼴이지 말하면서 나와 다른 존재로 금을 그어버리고  내 공간, 내 삶의 자리에서 아파하는 이들과 무관하게 살면서 예수를 따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보고,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서 은혜를 받았다 해도, 

연민이 없으면 단순한 종교인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메마른 가슴으로는 그 팍팍한 가슴으로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파하는 생명과 함께 아파할 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기적을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라고.

내가 나됨을 알게 될 때, 하나됨을 아는 순간, 온유하고 겸손해 집니다.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라고 하였습니다. 혹 나와 의견이 다른 것이 있더라도 멀리 내다보고 오래참음으로 사랑의 줄로 매게 될 때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북녘 땅에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을, 그 비참한 모습을 보고 내가 같은 아픔을 느끼고 내 형제 자매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높은 위치에서 누구를 구제하는 것처럼, 누구를 먹여살리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와 북한 동포들은 하나입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요, 소망이 하나요, 부르심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다른 것이라면 오직 은사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재물은 축복이 아니라 은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저 북한에 있는 동포들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저희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 됨입니다. 

이미 이루신 하나됨을 굳게 지켜나가심으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자유함과 평강을 진정으로 만끽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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