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살아나리라, 에스겔 37:1-10, 197장.
에스겔 36-42장
이번 주 토요일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설날, 구정입니다.
민족의 대이동이 있을 것이지만 우리 교회의 특징은 감사하게도 명절이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구약에서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성탄절,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을 3대 절기라고 합니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태어나신 날이고,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날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힘써 기도했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신앙 공동체인 교회가 이 땅 위에 세워지게 된 날입니다.
성탄절이 귀한 날이고 부활절 역시 더없이 귀한 날이지만 만약에 성령강림절이 없었다고 한다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는 아마도 미완성의 역사로 끝나고 말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예수님 대신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약속대로 보내 주심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는 아주 강하고 힘차게 진행되어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과 부활절은 단 한번 밖에 없는 유일회적인 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령강림절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늘 우리 시대에도 새롭게 계속 되어야 할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승천 이후에 실의에 빠져 있었던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를 통해서 다시금 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체험 이후에 성령의 권능을 힘입게 된 사도들은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나약하고 부족했던 그들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버리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앞장서 따라 다녔지만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에서 심문 당하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다가 한 여자 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겁쟁이 베드로가 이제는 솔로몬 행각에서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었고 그의 증거를 통해서 하루에도 삼천 명, 오천 명씩 회개하고 구원받게 되는 역사가 따르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의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겔에게 임했던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마른 뼈가 군대를 이룬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등동물일수록 땅을 쳐다보고, 더 하등한 동물들은 땅속에서 기어다닙니다. 그러나 고등동물일수록 점점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헬라 철학에서는 인간을 “안드로포스”라 하여,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언가를 믿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참 귀한 보배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생각과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믿음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고, 없는 것을 있게 하며,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귀한 믿음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늘 말 하는 ‘믿음’을 근본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구원받는 믿음과 상받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6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사건을 믿을 때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 믿음이 없이는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을 지라도,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을지라도 구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같이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는데 믿음의 체험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의 체험은 우리의 믿음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은 평상시에 무슨 생각을 하며 마음에 무슨 영상(imagination)을 그리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영상을 그리는 사람은 성공적인 사람이 될 것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그런 영상을 그리는 사람은 패배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귀의 하는 일은 부정적인 환상을 보여주며 불안과 공포를 갖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고 힘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기에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망하여서 소망이 없고 민족의 앞날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이었습니다.
다윗 언약 사무엘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언약 파괴자는 이스라엘 백성.
언약을 듣고 나면 자동으로, 출애굽해서도 40년, 여리고성, 아이성 전투.
그때 하나님의 권능이 에스겔에게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마른 뼈가 가득 찬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뼈는 이스라엘 온 족속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절망뿐이요, 죽음뿐이요. 허무함뿐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3절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른 뼈들이 어떻게 살아납니까?
상식적으로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볼 때 절대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 소망이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네가 다시 회복될 것을 믿느냐?”
에스겔은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가 문제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에스겔도 우리와 똑같이 실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에스겔 자신에게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면 아무리 마른 뼈라 할지라도 능히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0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는 이 모든 뼈들에게 대언하라.”고 말씀하였을 때 그는 귀도 없고 들을 수 없는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바로 믿는 사람에게만 허락하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상황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소망이 사라졌고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상태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회복의 능력이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실 때 말씀을 통해 회복시킵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대언하여 선포할 때 흩어진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뼈들이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힘줄이 생깁니다. 뼈들이 살아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용기가 생깁니다. 결단력이 생깁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인생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말씀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죽은 것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공허와 어둠뿐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살아나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모든 문제 해결이 있는 줄을 알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뼈들이 소리가 나면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뼈와 저 뼈가 들어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가죽이 덮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생기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육신만 가지고 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뼈에 가죽만 붙어있다고 산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생기’는 히브리어로 ‘루아흐’인데 현대어 성경에는 living soul,
즉 생명의 영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삶의 부흥과 우리 새하늘 교회의 부흥도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침체에 빠질 수 밖에 없고 골짜기의 뼈들처럼 아무런 역사도 이루지 못하는 나약한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성령은 능력을 부어 줍니다.
성령은 마른 뼈와 같이 별볼일 없는 사람들을 강한 군사로 만듭니다.
그리고 뼈들이 서로 연합할 때 그들은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도 서로 연합하지 못하면 큰 군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끊임없이 가정과 교회를 분열시켜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사단 마귀는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밤낮 쉬지 않고 방해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붙잡아주지 못하게 합니다.
분열시키는 일이 마귀의 전문 사역입니다.
본문 7절에 보면 마른 뼈가 서로 연결될 때 소리가 났다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서로 연합되려면 소리가 나야 합니다.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는 소리, 함께 찬양하는 찬송 소리가 나야 합니다.
절간은 조용해야 하지만 교회는 찬양과 기도로 이어지는 잔치집.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모두 하나가 되기 바랍니다.
이러할 때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 사단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나를 둘러 싸고 있는 어려운 환경을 정복해 나가는 당당한 하나님의 군사들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