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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안심하라<사도행전27:18-25>

목사님 0 964

   

 

      

       이제는 정말로 코로나가 막바지에 다가온 것 같습니다. 

누적 확진자가 천사백만명이라고 합니다. 전체 인구 3인 중 1인.

마지막 방역 조치로 10인에 12시까지.

우리 교회는 다음 주부터 셀별로 공동식사를 시작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그릇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은혜를 주시지만은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그릇에 그 은혜를 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사해라고 하는 바다가 있습니다. 사해는 농도짙은 소금물이어서 부력이 강해 가만히만 있어도 물에 뜹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가서 보니까 물에 뜨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뜨는데 버둥거리니까 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제발 마음 놓고 손을 펴보라고 해도 그걸 못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손을 펴야 됩니다. 버둥거리지 마십시오.  

의심과 두려움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심하면 두려움이 있고 두려워하면 의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천 년 전 그 옛날에 죄수를 태운 배 한 척이 지중해를 건너서 로마로 향해 가는 항해 중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유명한 크루즈 루트 중의 하나. 

항해 중에 미항이라고 하는 작은 항구에 도착하게 됩니다. 추운 겨울 동안은 바람이 거세어서 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한겨울을 나고 봄에 다시 항해를 시작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이 미항이라고 하는 항구에서 겨울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조금 더, 며칠 더 가서 저 앞에 있는 뵈닉스라고 하는 항구에 가서 겨울을 나자고들 합니다. 어차피 로마에는 봄에야 갈 수 있으니 이 지루한 겨울을 미항에서 나지 말고 뵈닉스에서 나자고들 합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미항은 조그마한 항구이지마는 안전한 곳입니다. 

그런데 작은 항구라서 위락시설과 술집이 없어서 지루하게 지낼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반면에 뵈닉스라고 하는 곳은 큰 항구이며 향락의 도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생각하며 뵈닉스로 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미항을 떠나 뵈닉스까지 가려는 것은 모험인 것입니다. 

이때는 강풍이 일어나기 쉬운 때인데 사람들의 선택을 보면,

생명의 안전이 우선인데 그런데 좀 위험하기는 하지만 모험을 해서라도 

향락이 있는 ‘뵈닉스까지 가자’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책임자격인 백부장도 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이같은 실수가 옵니다. 이래서 배는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향합니다. 

가다가 바울의 말대로 엄청난 폭풍우를 만납니다. 

그 풍랑 속에서 저들은 많은 노력을 해보았지마는 속수무책입니다. 

15절 “가는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또 18절에 보면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라 합니다. 사람이 살아야겠으니까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그 소중한 짐들을 다 바다에 던져버렸다는 것입니다. 

마라톤의 기본, 덜 걸치는 것.

또 20절을 보면 “구원의 여망마저 다 없어졌더라”합니다. 

이제는 끝났습니다.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한 번 잘못된 선택으로 해서, 잘못된 출발로 인해서 그들의 운명은 이렇게 경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파선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왔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22절 “이제는 안심하라”

인간의 모든 노력이 끝난 바로 이 시간에 바울은 그 풍랑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있는 선원들과 승객들을 앞에 놓고 안심하라 합니다. 

‘이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인간의 지혜, 인간의 경험, 그 의지하던 것 모두 끝나 다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생각도 많고 복잡했습니다. 의견도 많았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보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보입니다. 

들으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들리지, 소리가 났다고 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고집으로 꽉 차 있는데 무슨 말씀이 들리겠습니까? 

자기 욕심으로 꽉 차 있는데 들릴 여지가 있겠습니까?

이제 모든 사람의 마음이 다 비워지고 조금 겸손해 졌습니다. 

이때 메시지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이제 새하늘교회에 왔으니 안심하라.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제는 안심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근거는 세상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말씀이 들려옵니까? 가까이 들려옵니까?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사실상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어디에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본연의 위치에서 떠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을 때 성경은 이것을 심판이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케 되어 전혀 아무 말씀도 들을 수 없는 사람들로 살아가다가 멸망하는 이야기를 무수히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근본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아브라함아, 모세야, 사무엘아... 계속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 하나님의 음성이 어떻게 들려오고 있습니까?

얼마나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습니까? 

 

사람이 어떤 당면한 문제를 놓고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어떤 자세로 

기다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함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세 가지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용기, 또 하나는 냉정함, 또 하나는 지혜입니다. 

살다보면 부득이 우리로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앞에 닥칩니다. 

이런 때에 어떤 자세로 수용하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법입니다. 

 

그리고는 24절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바울이 로마로 가는 이유는 복음의 세계화입니다. 

그러려면 바울이 무사히 로마 가이사 앞에 서야 합니다. 

이 경륜은 분명합니다. 

바울을 로마에 보내기 위해서 이 배는 무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항로는 무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엄청난 경륜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이 좌절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잡다한 사건들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소원의 항구로 직행하게 만듭니다. 이게 하나님의 프로젝트요, 하나님의 드라마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여러분들이 겪는 모든 일을 통하여,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 가시고 계십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25절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 자체가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책임지시는 분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롬 10:17) 성경은 말씀합니다. 

구원의 역사도 복음을 들으면서 이루어집니다. 들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전도서 5장 1절을 보면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가까이 하여, 이는 집중하면서 듣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듣느냐, 어떤 자세,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자세,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자세, 예배하는 사람은 예배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갈 때는 주의를 주는데 연필을 꺼내 종이에 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지금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시간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뭘 쓰는 동안에 사실은 똑바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받아쓰려고 하면 하나 쓰고 둘 놓칩니다. 

또 목사인 제 개인의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마는 말씀 들으시고 자꾸 잊어버리고 해야 그 다음에도 제가 얘기할 것이 있지요. 뭘 다 기억해 두려고 합니까? 두고 두고 들을텐데, 죽을 때까지 들을 건데요.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읽고 듣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됨이 있습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들으면 말씀이 내게 감동을 주셔서 그 확신 위에 살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능력있게 되고, 지혜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세미한 음성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8-14장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8장 홍수의 종결과 지면의 회복 및 노아의 제사와 하나님의 언약

1-12절 하나님의 대홍수 심판이 끝나고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노아 가족과 짐승들이 살아갈 새 땅이 회복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13-19절 1년여의 지루한 방주 생활을 끝내고 노아 가족과 짐승들이 방주에서 나온 사실을 언급합니다. 

20-22절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제사드렸음과 제사를 기쁘게 받으신 하나님께서 인간과 자연계 보존을 약속하신 사실을 언급합니다. 

 

9장 홍수 후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과 무지개 언약 및 노아의 실수와 

세 아들에 대한 예언.

1-17절 대홍수가 종결된 후 무지개 언약을 보여줌

18-29절 홍수 이후 구속사가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을 중심으로 전개

 

10장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한 인종의 번성

1-5절 야벳 후손의 명단 6-20절 함 후손의 명단 21-32절 셈 후손의 명단

 

11장 바벨탑 건축과 인류의 분산

1-9절 바벨탑 건축과 언어의 혼잡

10-32절 셈에서 아브람에 이르는 계보

 

12장 하나님의 부르심과 아브람의 순종 및 애굽에서의 실수

1-9절 아브라함의 소명과 가나안 이주

10-20절 아브람의 애굽 이주와 실수

 

13장 아브람과 롯의 분리 및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

 

14장 가나안 남북 전쟁과 아브람의 롯 구출 및 멜기세덱의 축복

1-12절 가나안 남북 전쟁과 롯의 사로잡힘

13-16절 아브람의 롯 구출

17-24절 소돔 왕과 살렘 왕의 아브람 영접

살렘 왕은 멜기세덱으로 표시 히브리서에 설명이 보충.

20절 십일조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에서 성문화 되기 이전 이미 고대 근동 지방에서 신전 봉사자들의 생계를 위해 바쳐졌던 보편화된 제도.

그러나 십일조의 근본 정신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데서 비롯되어야 하며 또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의 표시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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