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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히 쓰는 그릇(디모데후서 2:20-21)

목사님 0 1,228

   

 

    

     UN에 다니는 어떤 여자 분이 중동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가 마법의 램프를 주워서 문질렀더니 지니가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란 여자가 자기가 원하는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지니가 하는 말이 “나는 딱 한 가지 소원만 들어줄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말해보세요.” 여자는 주저하지 않고 씩씩하게 말했습니다.

“저는요, 중동 지역의 평화를 원해요. 여기 이 지도 좀 보세요.

유대인들과 아랍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싸우고 있습니까!

제발 이 지역에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세요.“ 

지니는 중동 지역의 지도를 한참 바라보더니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여기 이 나라들은 장장 수천 년 동안 서로 피 튀기게 전쟁을 해온 나라들입니다. 제가 램프 속에 갇혀 있은 지가 500년이 넘어서 자신이 없네요. 실현 가능한 다른 소원을 말해주세요.”

이 여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른 소원을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저에게 꼭 맞는 신랑감을 찾으려 했으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런 남자가 있으면 만나게 해주세요. 사려가 깊으면서도 유머 감각이 넘치고, 요리 잘하고, 집안 청소와 세탁까지 잘하는 남자, 더 나아가 친정 식구들에게도 잘해주고, 휴일에는 집안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TV 보지 않고 저를 재미있는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그런 남자 좀 찾아주세요!” 

여자의 말을 들은 지니는 한숨을 깊이 쉬더니만 

“지도 좀 다시 봅시다. 좀 어렵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중동 지역의 평화를 이루어 드리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네요”

이 세상에 청춘남녀들이 그렇게도 많은데 막상 결혼 상대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직장에서 일꾼을 뽑으려고 해도 지원자는 많은데 적절한 사람을 뽑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일꾼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모세나 여호수아처럼,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바울이나 디모데처럼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기대 그리고 목적 없이 태어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은사와 재능과 재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과 재물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최근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변 여러 사람들의 증거들을 볼 때 ‘물질이든, 

지식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주를 위하여 쓰면 하나님이 형통하게 

풀어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들 중에도 금과 같은 사람과 은과 같은 사람 그리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같으면 아마 금그릇과 은그릇 같은 사람만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금그릇과 은그릇과 나무그릇과 질그릇을 다 쓰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금그릇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은그릇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기죽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 사람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 세상적으로 볼 때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27, 28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페하려 하시나니”

예수님의 제자 중 대부분은 세상적으로 볼 때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나무 그릇과 질 그릇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합니다. 

‘금이냐? 은이냐? 나무냐? 질이냐?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그와 같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사도행전 10:34, 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 쓰임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마음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주를 위하여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을 쓰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인생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고 세상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죄의 뿌리가 욕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은 하나님을 위하여 쓰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인색한 마음입니다. 

욕심은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하여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묶인 것들이 풀리고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스스로 다루어야 할 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우리들 마음에 들어가면 일어나는 현상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무슨 은혜를 주셨는지 모두를 잊어버리는 영적 치매 현상에 걸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도와주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자기 욕심을 버릴 때부터 가능합니다. 

인생은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됩니다. 

인생의 어려움들이 풀려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주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먼저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일조는 참으로 쉽지 않은 몫입니다. 사람들은 재물의 십일조만 생각하는데  시간의 십일조도 쉽지 않습니다. 1440분의 1/10은 144분 2시간 24분. 

그러나 그 쉽지 않은 일을 통하여 우리는 주를 위하여 쓰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서 "나를 시험하여"라고 하는 것은 "나를 체험하라"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보시는 중심의 두 번째는 깨끗함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은 금 그릇도 아니요 

은 그릇도 아니라 깨끗한 그릇입니다. 우리에게는 은과 금이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정말로 귀히 여기시는 것은 깨끗함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치명적인 무기와 전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하게 하는 것’ 그리고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합니다.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성도는 어두움을 떠나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 온 여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자 나이든 장로부터 어린 사람들까지 슬그머니 돌을 내려놓고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용서로 끝내지 않고 죄로부터의 분리를 요청하셨습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성도는 용서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어두움을 떠나며 죄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은과 금을 숭배하기 쉬운 세상입니다. 은과 금에 관한한 세상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깨끗한 그릇으로 살기는 점점 더 악하고 나쁜 세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죄가 문화가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죄가 문화가 된 세상이란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깨끗하면 오히려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 안 짓고 어떻게 살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짓고는 살 수 없는 세상. 그러므로 웬만한 죄는 죄로 여겨지지도 않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문제는 저를 포함한 저와 여러분들의 대부분은 죄에 대하여 둔감한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제는 죄 짓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고 별로 불편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우리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보편화된 죄의 문화에 익숙해져 하나님을 따라 살지 못하고 세상을 따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죄를 짓고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피흘리기까지 대항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죄에 대하여 얼마나 대항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회개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아파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마태복음에서는 ‘애통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면 시편 51:17에서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하셨으며, 시편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면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을 괴로워하였습니다. 로마서 7:25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고백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형통한 삶을 원하십니까? 묶인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진정으로 풀려나 형통하고 복된 삶을 살기를 여러분 정말 원하십니까?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시면 됩니다. 

주가 쓰시겠다하시면 인생의 모든 묶인 것들이 풀릴 것입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확신합니다. 

그런데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싸워야 합니다. 

자신과 싸워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신 깨끗한 그릇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한 그릇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세상이 그를 묶을 수 없습니다. 자연 형통하고 복 받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은 모든 분들이 하늘나라를 침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예비해 놓으신 이 땅에서의 축복을 쟁취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성경 일독 시편 37~43편

 

37편 다윗이 노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본시는 의인이 고통당하고 

도리어 악인이 형통하는 듯한 모순된 현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공의의 섭리는 계속되고 있으며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이 

그 행위에 따른 공의의 심판을 반드시 행할 것을 설파. 

1~6절  11절 마태복음 5장 5절

 

38편 다윗의 밧세바 간음 사건 후 징계의 중함에 대한 호소와 사죄의 요청.

1-3절 21-22절

 

39편 임종 직전의 다윗이 병상에 누워 인생 여정을 돌아보며 삶을 정리하는 자세로 지은 시 9절 

 

40편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던 다윗이 과거에 자신에게 베푸신 구원에 감사하며 다시금 자신이 처한 위기에 구원을 간구

 

41편 다윗이 인간적 배신에 대한 탄식과 그러한 패역한 인간들과는 달리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사. 

9절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

 

42편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나 있는 중에 시온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소망하여 노래한 시온시. 1절

5절 12절 43편 5절

 

43편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간구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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