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6일 집으로 들어가는데 기침 시작, 집에서 자가검사키트로 검사, 음성
2월 27일 주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 다시 검사
음성 주일 설교를 하는데 힘들었지만 마치고 십으로 들어가다 PCR 검사.
2월 28일 월요일 오전 9시에 확진 통보 후 자가격리
3월 5일 자정을 기해 자가격리 해제
그런데 집에 있으면서 설교 준비가 잘 되지를 않아, 하기 싫다는 표현이
정확. 그런데 교인들의 마음도 마찬가지. 요즈음 예배를 못오겠다는 연락이 토요일 오후에 카톡으로 많이 옵니다.
교인도 몇 되지도 않는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오늘 새벽에 눈을 뜨면서 국토회복운동이란 단어가 딱 떠 올랐습니다.
레콩키스타,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한 포르투칼과 스페인을 탈환하기
위하여 일어난 기독교의 국토회복운동.
1492년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그라나다 왕국을 함락함으로써 종식.
지금 우리도 주일성수를 위해서 다들 결단을 하고 마음을 모아야.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 상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역사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나라건 망할 때는 윤리, 도덕적으로 문란할 때 망했습니다.
대로마제국의 멸망도 도덕적으로 타락해서였습니다.
GNP가 높아졌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잘살게 된다고 하여 거기에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우리가 바로 깨어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깨어 있어서 지금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영적 의미를 감지할 수 있는 지각을 키워야 합니다.
과학은 정말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현대 자동차 선전을 보니까 사람과 같이 산책하는 로봇견이 등장하였습니다. 뛰어 다니고, 장애물이 있으면 점프도 합니다.
이렇게 과학은 점점 발전하지만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를 중단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수한 인재들이 많고 고성능의 컴퓨터가 있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대신 음주, 도박, 마약 등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게임.
일제 시대에 일본사람들이 우리 국민에게 쓴 우민정책의 첫 번째가 술집과 유곽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리마다 술집을 열어 나라 잃은 젊은이들이 그 심정을 술로 달래게 했습니다.
그때 나온 노래들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왜 시작했는지 아십니까?
광주 사태에 대한 관심을 스포츠로 돌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누룩을 긍정적인 의미로도 말씀한 곳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도덕적인 부패와 타락, 악한 감화력, 영적으로 사람들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잘못된 가르침을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핍박에 의해 믿음의 본질이 훼손되기보다 잘못된 가르침,
거짓된 교훈에 의해 믿음에서 사람들을 실족하게 했던 일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통하여 부각된 구원파. 통일교, 신천지.
그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 같았지만 율법의
기본 정신인 인, 의, 신은 버린 자들이었습니다.
헤롯의 누룩의 의미는 교회에 와서 십자가의 의미는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신앙 생활이란 십자가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영광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람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앞에 나서야 합니다.
앞에 나서다 보면 얼굴도 드러나고 욕도 얻어 먹습니다.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두려워서 나서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이끌어가는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모험도 하고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진정한 실패란 없기 때문입니다.
실패가 아니고 경험입니다. 훈련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깨어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이 무려 22번이나 나옵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하실 때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는 베드로를 향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간곡히 부탁하십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하다가 급기야는 예수를 배반하는 비참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합니다.
멍청하게 생각 없이 있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것입니다.
미국 플로리다의 디즈니월드를 개장할 때, 월트 디즈니는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사장에서는 그의 부인이 그를 대신하여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남편 분이 이것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 말을 들은 디즈니 부인이 “그 양반은 우리보다 먼저 보고 가셨답니다.”
자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디베랴 바다를 건너가시는데, 마침
식사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 안에는 떡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왜 떡이 하나 밖에 없느냐’ 바로 책임 소재를 추궁한 것입니다.
‘이것은 회계 맡은 유다의 책임이다, 베드로는 수제자라고 하면서도 그런 것도 챙기지 못했느냐?’ 누구의 책임인지 서로 변론을 벌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께서는 오천 명도 먹이시고 사천 명도 먹이시는 이적과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저들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오병이어를 목격한 제자들이라면 적어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하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한테만 딱 붙어 있으면 ‘밥 걱정 안해도 되겠다, 경제 문제로 걱정 안해도 되겠다’ 이것만 깨달았어도 변론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였는데 떡 한 개로 열두 명을 못 먹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면 그 요지가 두 가지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깨달아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없고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병든 심령은 참으로 보기에 안타까운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행복하면서도 스스로 행복한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행복은 가진 것을 사랑하지만 불행은 갖지 못한 것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하는데 나는 부족한 것을 더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내 처지가 좋다고 하는데 나는 내 생에 대한 긍지가 없습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깨달음과 정비례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깨닫지 못합니까? 깨달음이 없는 이유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 안에서 물러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상대방의 생각을 수용하는 만큼 발전하게 됩니다.
늘 자기 생각만 옳고 남의 말은 들을 줄 모르는 사람들은 발전이 없고 항상 본인 자신도 어둡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듣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이미 가진 경험과 지식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이 아집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변화에 대한 호기심, 즉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망할 때는 귀부터 먼다고 합니다. 듣는 귀가 없으면 망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 많은 말씀을 하시면서도 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결론을 맺으십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듣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다음에는 그 은혜를 기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내리는 가운데서 기적적으로 출애굽합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왔습니다.
그러나 채 두 주일도 못되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받은바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곧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빨리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원한은 모래 위에 쓰고 은혜는 바위 위에 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반대로 살려고 합니다.
은혜는 물 위에 쓰고 원한은 가슴에 파묻습니다.
죽을 때까지 못 잊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까지 못 잊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적의 현재성을 믿어야 합니다.
예전에 기적이 있었다면 오늘도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그 역사가 결코 옛날 이야기일수 만은 없는 것입니다.
내게도 똑같은 기적이 나타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과거의 그 큰 기적 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기적과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사람마다 근심 걱정하는 것은 어제의 기적의 뜻을 몰랐고, 설사 기적의 뜻을 알았다 하더라도 망각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인도로 살아왔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욥이 신앙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모릅니다.
오직 주께서 아십니다. 욥기 23:10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모르는 길을 오늘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주님의 인도에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도 기적은 있습니다. 오늘도 새로운 감격에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에 능력이 있고 여기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오늘 주신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기억하며 이 땅에서의 온갖 유혹과 어려운 일들을 이겨나가기로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시편 105-118편
105편 선민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회고함으로 그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며 언약에 신실했던 하나님에 대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시. 19절
106편 본시는 105편과 같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찬양하는 시이지만 105편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 성취와 주권적 섭리를 감사하고 있는데 반하여 본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반복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시.
107편 9절 20절 31절
본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만 일삼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바벨론에서의 귀환이라는 기적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
108편 다윗이 모든 원수들을 하나님이 멸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쓴 시. 12절.
109편 4절 17절 8절은 가룟 유다와 맛디아를 의미
악한 계교를 가지고 대적하는 원수들에 대한 강한 저주와 자신에 대한 구원을 호소하는 시. 한편 본시에 나타나고 있는 대적자들의 악행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시인의 탄원은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받고 수난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 성격을 가진다.
110편 3절 종말에 있을 메시야의 날에 대한 예언의 성격이 강한 시.
1절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정복자의 의미
111편 5절, 10절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 같은 절기 때 사용하기 위해 지은 감사 예배시.
112편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지혜인 것을 강조하며
주어지는 축복을 나열한 시
113-118편 6편의 시편은 할렐시 모음집으로서 유월절 등의 종교 절기에
각 가정이나 성전에서 공중 집회용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은 찬양시.
113편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기까지 인자히신 분이라는 사실을 감격적으로 찬양. 빌립보서 2:5-11
114편 출애굽으로 시작해서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체험한 하나님의 권능을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찬송
115편 9절 16절
인생이 과연 누구를 의지하고 경외해야 하는지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
116편 12절
본시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구원함을 받은 자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돌리는 개인적 찬양시.
117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에 대하여 감사하는 시.
공공집회시 예배에 앞서 인도하는 송영으로 사용
118편 6절 8절 9절
고난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있는 찬양시
22절 다윗이 사울의 박해에서 구원을 받아 왕으로 세우심을 묘사.
예수께서 마태복음 21:42에서 직접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