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삶 블랙가비 목사님은 ‘Spritual Leadership’이라고 하는 책에서 ‘영적 리더쉽이란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책임지는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 탓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저 일은 내 책임이다, 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소명을 받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십니다.
엄청난 이야기가 아닙니까? 나이 80세, 인생으로서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행하신 일은 천지개벽을 일으키신 것이 아니고 오직 조용하게 ‘한 사람’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나 하나, 참으로 중요합니다. 세상이야 어떻게 가든 나 하나만이라도 똑바로 서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겠다, 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을 하는 한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볼장 다 보고 마는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지옥을 방문하게 되는데 지옥의 문패에는 이렇게 써있다고 합니다. “이 문을 들어서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을 묘사할 때마다 새 것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고, 천국에서 부르는 노래를 새 노래라고 하고, 천국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언제나 새로움이, 참신함이, 신선함이 있습니다. 반면에 같은 사람이라도 은혜가 떨어지면 그 사람에게서는 새로움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너무나 두려운 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라 하면 너는 갈 일이다, 네 과거도 알고 네 미래도 알고, 네 현재의 부족함도 안다,
다 안다, 그리고 처음 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 과거, 네 미래, 네 신분, 네 자존심, 다 벗어버리라, 함입니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무대 정면에 중요한 인물로, 위대한 인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설교를 듣거나 기도 할 때, 성경을 읽는 중에 어떤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사로잡으면 의심 없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 순간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부르시고 계시구나! 하고 얼른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겠나이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 듣고 나면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출발점이 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반응한 사람들은 모두 새롭게 되어서 대단히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부름 받는 시간 이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삶은 사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순간부터 공적인 경기가 시작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부름을 받기 이전을 잘 설명 하고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부름 받은 75세 이후의 삶만 그려져 있고, 그가 전에 무엇을 했는지, 선하게 살았는지 악하게 살았는지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그의 태도 하나, 하나를 생중계하듯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80세에 하나님께 부르심 받기 이전의 삶은 짧게 언급이 되고 이후의 삶에 대하여 출애굽기, 민수기를 통하여 전해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에 대해서는 꽤 자세히 말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30년의 세월에 대하여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과 저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지금,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난 다음 어떻게 살았느냐?
어떻게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은 자랑할 것도, 또 부끄러워 할 것도 없습니다.
똑 같은 말씀을 몇 사람이 같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큰 축복을 받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4:2에 보면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으로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들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믿음으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무지 내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게 느껴지지만 내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놀라운 일이 내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나를 향해서 큰 복과 놀라운 비전을 준비하셨군요.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이 믿음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아무 희망없이 살아가던 80 노인 모세가 이제 하나님을 만나고 거듭 태어나고 보니 의미없다고 생각했던 지난 80년이 버려진 과거가 아니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 속에 그 80년은 예비된 기간, 필요한 훈련기간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그는 바로의 궁전에서 많은 애굽의 문물과 애굽의 학문을 익힙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자면 애굽을 잘 알아야 됩니다.
또 그런가하면 광야에서 목자로서의 40년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키우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때 교만하기도 했고 혈기도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안된다고 사람을 때려 죽이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동안 그는 과거의 혈기 다 버렸습니다. 애굽의 왕자로서 갖고 있던 꿈도, 욕망도 완전히 버려집니다. 인내를 배웁니다. 온유함을 배웁니다. 거기서 그는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40년도 지도자의 소양을 키우는데 꼭 필요한 그런 40년이었습니다. 쓸데없는 과거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을 위해서 있었던 과거입니다.
여러분, 혹 실수한 일 있으십니까? 그 실수 때문에 내 인생은 다 망쳐버렸다고 하시겠습니까?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 이렇게 말하십니까?
이제 끝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과 그 뜻 안에서 새롭게 자기를 발견하는 순간 지난 날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3:5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아주 버려졌다고 생각했던 과거, 그 집착으로부터 깨끗이 벗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과거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그것이 신앙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너는 가라,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고, 아주 무능한 것 같아도 너는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하나님의 그 말씀에서 그는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특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 형편을 다 아시고 부르십니다.
그의 혈기, 그의 죄악됨, 그의 나약함 다 아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고하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그 분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소명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내가 고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파울로스 아포스톨로스 둘로스 예수 크리스투’
바울, 사도, 종,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사도 바울은.
사도는 영광된 이름입니다. 종이란 비천한 이름입니다.
이 두 이미지를 한 몸에 지니고 삽니다.
사도인 동시에 종이요, 종인 동시에 사도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그의 정체성입니다. 사도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주님의 뜻만을 전적으로 순종하는 종됨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리고 내게 맡겨진 사명이 뭐냐? 사명파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세상에 보내셨으며 내 일생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가, 이 사명을 알고 출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에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정체성입니다.
‘일군’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풀어보면 ‘노를 젓는 자’라는 뜻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큰 배가 나오는데 이 배 아래부분은 노 하나에 노젓는 노예들이 한 명씩 배치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노예들은 명령이 떨어지면 노를 젓습니다. 일제히 젓습니다. 빨리 저으라면 빨리 젓고 멎으라면 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여기에 질문은 없습니다.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노를 젓습니다. 보상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일군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이 부르심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절대 믿음, 절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나의 능력도, 나의 경력도, 나의 과거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이 사실만을 믿어라, 백성들로 이 사실을
믿게 하라,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가져야 할 자기 의식, 정체감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역사하신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만 믿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준 것이 모세를 통한 이적, 기적입니다. 여러분, 기적을 믿으십니까? 여러분, 성경을 믿으려면 전부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여 이것을 요렇게 빼고 저것을 조렇게 빼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모세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생애는 이적으로 충만하고, 이적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역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전적인 순종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강권적으로 보내셔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셨다, 그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절대 순종, total acceptance, 절대수용입니다.
내가 했다 하는 순간 우리는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절대 헌신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부족한 것 다 아십니다. 그러니 할 말 없습니다. 그저 딱 한 마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 뿐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을 오늘도 부르고 계십니다.
나의 부족함과 허물은 끝이 없이 많지만 그러나 내 모습 이대로를 하나님께 바치는 그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오늘도 부르고 계십니다.
그 누구든 오늘 주님의 그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하고 그대로 주께 맡기면 이제 새로운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새로운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새로운 능력으로 크고 놀라운 일을 이 땅에서 펼쳐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