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준 성도님(3시 뇌파 검사)과 황상진 성도님
이 작은 교회에서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같은 날 치료.
이선화 성도님이 8월 22일 고린도전서 11장
여자는 왜 공적 예배에서 머리를 가려야 하는가?
김판임 교수님의 글. 괴팅헨에서 유학.
이번에 성경 일독을 하면서 로마서와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어디서든지 목사라는 것을 당당히 밝힐 수 있어야 하겠구나.
Adiaphora
신학에서 ‘아디오포라’라 할 때 그것은 성경에서 직접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규정이 없고 또 성경에 계시된 객관적 진리들에 비추어 볼 때
상황과 목적에 따라 다르게 설명될 수 있는 문제들을 가리킵니다.
개종한 이방인에 대한 할례 시행(사도행전 15장)
구약에서 규정하고 있는 각종 절기 준수(로마서 14장)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수 있는가?(로마서 14장)
한국 교회에 적용해 보면 주초 문제, 즉 술과 담배 문제.
과거 한국 초대 교회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요청되었던 것들로서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하여 새롭게 이해될 필요가 있지만
로마서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고린도전서 8: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바울은 교회의 화홥을 위하여 먼저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며 자기를 기쁘게 하기 보다 형제를 기쁘게 하여 덕을 세우는 일이 중요, 즉 교회의 화합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믿음이 강한 자에게 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결혼 70주년을 맞으신 노부부가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참 오래도 같이 사셨습니다.
그런데 두 분 하시는 말씀이 세월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일주일 전에 결혼한 것 같은데 70년이 흘렀다고 하십니다.
이런 저런 내용의 인터뷰를 하다가 아나운서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만일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 분하고 결혼하시겠습니까?”
할아버지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할머니가 대답을 합니다.
“내가 돌보아 줘야죠!” 뭐 결혼한다 안한다 가 아니고 저 사람에겐 내가
필요하다, 이것입니다. “내가 도와줘야 합니다.”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사랑이 에로스냐, 필리아, 아가페냐,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용어입니다.
쉽게 말하면 에로스는 항상 나 중심입니다. 나를 위해서 저를 사랑합니다.
내게 저 사람이 필요해서 사랑한다고 합니다. 나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배우자를 괴롭히고, 자식을 괴롭힙니다.
그리고는 내가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가페라고 하면 그 중심이 내가 사랑하는 그 대상으로 옮겨갑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할까?를 생각하면서 배려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살면서 많은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지만, 가장 큰 아픔을 남기게
만드는 것은, ‘좀 더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을 한다 해도, 예언하는 능이 있다 해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선행을 해도,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고린도전서 14장 은사장을 시작하면서 은사를 구해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십니다.
사도 요한 또한 요한일서 4:7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단언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 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주위사람을 본의 아니게 실망시킨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실망시키고 자식이 부모를 실망시키기도 합니다. 직장 동료들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실망시키면 자괴감이 들어
상대방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점점 보이지 않는 담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는 저 사람을 몰라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라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 혹시 나에게 해악이 가해지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말씀대로 살면 손해 볼 것 같아서.
여러분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십니까?
그러면 누가 움직였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은 늘 제 자리에 계신데 우리가 움직인 겁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도망가고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망을 갔던 제자들은 자신에게 실망을 했습니다.
“아, 이제는 끝났다. 예수님께서 나를 좋아하실 리도 없고 내가 예수님을 볼 면목도 없구나. 이렇게 예수님을 배반한 나를 다시 쓰시지 않을 거야.
그러니 갈릴리 바다에 옛날처럼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로 가서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옛날에는 고기 잡는 일이 전문이었는데 지금 와서는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업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심한 허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존재, 쓸모없는 존재야.”
이렇게 낙심하고 힘없이 돌아오는 제자들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고기를 얼마나 잡았소?” “고기는 무슨 고기, 한 마리도 못 잡고 밤새 고생만 했소.” “그러면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져 보시오.”
피곤해서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말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 153마리를 그물에 가득 차도록 잡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떠나 생업으로 돌아간 베드로나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오히려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떡과 생선을 준비해서 “와서 나와 같이 조반 먹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나를 사랑하실 리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여러분에게 다가오셔서 말을 거시고,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혹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했거나 하나님을 실망시켰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여러분을 찾아 오셔서 받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 번 찾아오시는데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던 죄인입니다.
계집종 앞에서 벌벌 떨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저주하고 맹세하며,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 그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은,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무려 세 번에 걸쳐 행해졌습니다.
네가 나를 버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네가 어떤 죄를 지었고, 과거에 네가 나를 부인했고, 과거에 네가 큰 죄를 지었던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입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베드로만 주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주님을 부인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나에게 주님은,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 질문을 하시는 까닭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자!’ 그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서로 서로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가정에,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가난도, 시련도, 아픔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힘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나 또한 주님을 사랑하며 의지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새롭게 펼쳐질 것입니다.
완전히 망가졌던 베드로의 인생이, 주님과 더불어 다시 시작되었던 것과 같이, 내 인생도 그렇게 새 출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과거의 일에 매달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묻지 않으십니다. 오로지 질문은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그런 주님의 질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당당하게 고백하며, 주님께로 힘차게 달려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